아웅산서 간발의 차로 목숨 구해…北 무력보복 대신 '늑대사냥'[전두환 1931~2021]

중앙일보

입력 2021.11.23 15:01

업데이트 2021.11.23 16:39

23일 별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1980~88년)은 남북 관계에서도 격동의 세월이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로 남북 간 대결 국면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한반도의 위기였다. 87년엔 대한항공 KE858편 여객기가 북한의 폭탄 테러로 미얀마 상공에서 폭발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간발의 차로 목숨 구해

쾅~. 폭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해지더니 지붕이 내려앉았다. 곧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웅산 국립묘소에서 폭파 사건이 발생한 뒤 미얀마 당국이 한국 측과 함께 사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아웅산 국립묘소에서 폭파 사건이 발생한 뒤 미얀마 당국이 한국 측과 함께 사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28분(현지시간) 미얀마(당시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소에선 지옥의 풍경이 펼쳐졌다. 전 전 대통령이 미얀마를 국빈 방문한 지 이틀째 일어난 사건이었다. 전 전 대통령 일행을 노린 폭탄 테러였다.

당시 이기백 합참의장의 부관이었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테러 당시 중위)은 “폭발 순간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충격이 너무 커 일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전 전 대통령은 안내를 책임진 미얀마 외무장관이 당초 일정보다 영빈관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화를 피했다.

그러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을 포함한 공식ㆍ비공식 수행원 17명이 그 자리서 숨졌다. 이기백 합참의장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처음부터 북한이 아웅산 테러의 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미얀마 경찰 당국은 그해 10월 4일 최종 수사결과 발표에서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 3명이 북한군 강창수 소장으로부터 전 전 대통령과 수행원에 대한 폭탄 공격 명령을 받아 저지른 소행이라고 밝혔다.

북한 공작원 신기철은 체포 과정에서 사살됐다. 체포된 김진수는 85년 4월 사형이 집행됐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강민철은 미얀마 교도소 수감 중인 2008년 5월 18일 중증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강민철은 생전 “미얀마ㆍ한국 정부에서 허용한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알렸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들은 차에서 내리는 이계철 미얀마 대사를 전 전 대통령으로 착각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이 단상에 줄지어 서 있는 상황에서 미얀마 군악대도 진혼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은 수사 과정에서 당시 주위 무전 주파수들이 많아서 폭탄이 오발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결국 ‘단호한 응징’ 포기  

전 전 대통령은 순방 일정을 중단하고 테러 다음 날 서둘러 귀국했다. 귀국 후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며, 반드시 단호히 응징할 것”이라며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비상국무회의와 국정자문회의를 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3년 10월 10일 특별기편으로 급히 귀국한 뒤 청와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었다. 중앙포토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3년 10월 10일 특별기편으로 급히 귀국한 뒤 청와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었다. 중앙포토

남북관계는 급랭했다. 휴전선을 지키는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완전무장해 출동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육사 12기를 중심으로 북한 보복 작전인 ‘벌초계획’이 만들어졌다. 특수부대가 평양에 들어가 중앙방송 송신탑과 대동강변 주체사상탑을 폭파하는 작전이었다.

당시 벌초계획 작전팀에 뽑힌 인사는 나중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밤중 서울 남산타워(현재 N서울타워)에 밧줄로 오르는 훈련까지 받았다”며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비장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은 그러나 무력 행사를 말렸다. 그는 “내 명령 없이 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간 반란으로 간주하겠다”고 막았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은 그해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라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기백 전 합참의장은 “전 전 대통령이 전면전 확대 시 6ㆍ25 때처럼 국토가 전장(戰場)으로 변해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실행을 중단시켰다”고 설명했다.

전 전 대통령의 보복을 포기한 배경엔 미국도 있었다. 아웅산 테러 직후 미국은 한반도에 전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전투 준비 태세를 의미하는 데프콘 3단계를 발령했다. 한국은 81년 이후 데프콘 4단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데프콘 3단계가 되면 한국군 작전권은 한미연합사령관이 행사한다. 전면전으로 번질까 우려해 한국군의 독자 행동을 막으려는 미국의 의도였다.

전 전 대통령은 대신 외교적 응징 조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4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늑대사냥’이라는 코드명으로,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다른 나라들이 북한과 단교하도록 전방위적 외교전을 벌였다. 당시 정부는 늑대사냥을 위해 특사 파견과 경제협력 제공 등의 유인책을 제공하는 방안까지 구상했다.

임기말 KAL기 폭파 사건까지

대선 직전인 87년 11월 29일엔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KE858편 비행기가 북한 폭탄 테러로 미얀마 상공에서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폭탄 테러로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1989년 3월 21일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1989년 3월 21일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바레인 경찰 당국에 의해 폭파범으로 김승일ㆍ김현희가 붙잡혔는데, 이 중 김승일은 음독 자살했다. 국가안전기획부 수사 결과 이들은 1984년부터 3년 7개월 간 폭파훈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KAL기 폭파사건으로 국내엔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남북 관계 역시 크게 악화했다.

2019년 3월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김현희가 붙잡혀있던 바레인에 박수길 당시 외교부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파견했다. 김현희의 신병을 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바레인 측에선 “KAL기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현희의 인도는 성급하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는 입장을 전달했는데, 이에 박 차관보는 “한국이 대통령 선거로 인해 극히 바쁜 와중에 방문해 조속히 귀국해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박 차관보가 김현희 인도 시점을 ‘늦어도 (12월) 15일 이전’으로 못 박은 것을 놓고 그해 13대 대선(87년 12월 16일)을 염두에 두고 테러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KAL기 폭파 사건은 13대 대선 판세를 뒤흔들었고, 당시 노태우 후보 당선으로 이어졌다.

한편 전 전 대통령은 82년 최초의 남북통일 방안으로 평가되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민족자결ㆍ민주ㆍ평화 등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 대표들로 구성된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하고 ▶민족통일협의회를 통해 통일헌법의 기초를 마련하며 ▶통일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상하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통일방안 설계에 참여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80년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6차 당 대회를 열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이에 대응할 우리 측 통일 방안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열흘 가까이 호텔에 머물려 만든 통일방안이 바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주요 연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전두환 전 대통령 주요 연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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