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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얘지고 싶어요"…피부색 집착이 부른 인도 여성의 수난

중앙일보

입력

수년간 수테로이드계 연고를 미백 크림으로 알고 사용해온 바닉은 얼굴에서 굵은털이 자라나 꾸준히 제모를 해야 한다. [홈페이지 캡처]

수년간 수테로이드계 연고를 미백 크림으로 알고 사용해온 바닉은 얼굴에서 굵은털이 자라나 꾸준히 제모를 해야 한다. [홈페이지 캡처]

인도 캘커타주 공무원인 소마 바닉(여·33)은 14살 때부터 최근까지 스테로이드계 연고를 온 얼굴에 발라왔다. 바닉은 이 연고를 얼굴색을 하얗게 만들어 주는 ‘미백 크림’으로 믿고 사용해왔다.

수년간 사용한 연고로 인해, 바닉은 희고 고운 피부 대신 화농성 여드름과 머리카락처럼 굵고 긴 털이 올라오는 얼굴을 얻게 됐다. 바닉이 사용한 제품은 건선·습진 부위에 국소적으로 발라 증상을 치료하는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다. 장기간 사용하면 다양한 부작용을 겪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저색소 침착’으로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것이다.

인도 약국에서 피부 미백제로 통용되는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 홈페이지 캡처

인도 약국에서 피부 미백제로 통용되는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 홈페이지 캡처

21일(현지시간) 미국 CNN 방송은 인도 전역에서 많은 여성들이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를 ‘피부 미백제’로 오용하다 농포·홍조·다모증 등 심각한 피부 트러블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현상의 근본 원인으로 인도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피부색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지적했다.

인도는 피부가 흰 여성을 과도하게 선망하고, 피부가 검은 여성들은 조롱과 학대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실제로 2014년 인도 델리 남서쪽 구루그람 지역에서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는데, 가족들은 CNN에 “남편으로부터 피부가 검다고 엄청난 멸시와 학대를 당해왔다”고 털어놨다. 1년 뒤인 2015년엔 캘커타에서 한 여교사가 스스로 분신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는 “너처럼 까만 여자와 결혼할 남자는 없을 것”이라는 조롱을 듣고 분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지난 8월 한달 동안 인도의 최대 영자신문인 타임오브인디아·텔레그래프·힌두스탄타임스의 일요일판에 게재된 광고를 분석해 ‘하얀 피부’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 조사했다. 1332개의 광고 중 ‘하얀 얼굴’ ‘창백한 피부색’ 같은 표현이 포함된 것은 22%였다. 이에 대해 인도의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연구원인 리나 쿠레자는 “인도의 가부장적인 젠더 규범, 불평등한 남녀관계가 반영된 것”이라며 “인도에서 미혼 여성은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게 되는데, 피부가 검고 가난한 여성일수록 남편을 구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인도 여성들이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를 장기간 사용해 겪는 부작용들. [홈페이지 캡처]

인도 여성들이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를 장기간 사용해 겪는 부작용들. [홈페이지 캡처]

바닉 역시 십대 때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로부터 “돼지보다 더 못생겼다”는 조롱을 들었다. 바닉의 어머니는 이웃들로부터 “딸의 얼굴이 까매서 좋은 곳에 시집가지 못할 것”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바닉은 “어머니는 항상 내 피부를 ‘고쳐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고, 14살이 됐을 때 하얗게 만들어주는 크림을 알게 되자 즉각 구해줬다”고 말했다.

인도의 피부과 의사인 샴 베르마 박사는 “현재 인도의 약국에서 의사 처방전 없이 베타메타손 스테로이드 연고를 판매하는 게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대다수 약국에서 이를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부 관리 전문병원 위즈덤의 쿠식 라히리 박사는 “하얀 피부에 대한 집착이 부른 스테로이드 연고의 오남용은 인도 사회에 퍼져있는 조용한 전염병”이라며 “대중의 무지, 법적 모호성, 정부의 무대응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키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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