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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비용 최소화는 옛말, 부품·소재 공급망부터 넓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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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코로나 이후 세계 무역질서의 ‘뉴 노멀’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중국의 수출 제한으로 불거진 ‘요소수 품귀 사태’는 무엇을 남겼나.

디젤차에서 나오는 질소산화물을 줄여주는 촉매제인 요소수는 버스·트럭 등 디젤차의 운행에 필수적이다. 이들 디젤차에 장착된 배출가스 저감장치에 요소수를 주기적으로 넣어야 한다. 요소수가 부족해지면 경고등이 켜지고 시동이 걸리지 않게 된다. 이렇게 치명적으로 중요한 요소수를 만드는 원료인 요소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해 왔다. 중국산 요소는 국내 요소 수입량의 3분의 2, 요소수의 원료가 되는 산업용 요소의 97.6%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별도의 수출심사 없이 수출되던 요소에 대해 중국이 검역을 강화하면서 그 파장은 한국으로 미쳐 요소수 품귀로 연결됐다. 왜 중국은 별안간 검역을 강화했을까. 요소 가격이 급등하면서 중국 내 수급조절이 그 이유이다. 요소 가격이 급등한 이유는 요소생산의 원료인 석탄이 주요 수입국인 호주로부터 제대로 수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발생에 따른 중국 책임을 국제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호주를 겨냥한 경제보복 조치가 부메랑으로 다가와 중국의 발등을 찍은 셈이다.

중국의 경제 민족주의 드세져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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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출 제한으로 불거진 ‘요소수 품귀 사태’는 세 가지 정책과제를 남겼다. 첫째, 특정국에 집중된 과도한 수입 의존의 다각화. 둘째, 국내 생산기반 확보. 셋째, 미·중 패권경쟁 가속화에 따른 불똥이 한국경제의 어느 곳에 튈지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 주목할 것은 이 세 가지 과제가 별개 사안이 아닌 서로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중국이 호주를 상대로 무역 보복을 하지 않았다면 요소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중국이 별안간 요소 수출을 통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내 생산기반이 없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다. 중국의 호주에 대한 무역보복은 미·중 패권경쟁이 가속하면서 미국 중심 동맹축으로 확연하게 무게중심을 이동한 호주에 대한 중국의 대응조치다. 이번 요소수 품귀 사태를 만들어낸 구조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구조적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갈수록 드세지는 중국의 경제 민족주의와 기존 자유경제 질서에 대한 도전, 여기에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들과의 연합전선으로 중국을 길들이려는 미국. 그래서 미·중 경쟁은 ‘나 홀로 중국 때리기’에 열중하던 트럼프 1막을 지나, ‘민주주의 기술동맹’을 기치로 내건 바이든 2막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요소수 품귀 현상이었지만, 다음엔 중국 의존도가 높은 다른 어떤 것의 공급혼란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높은 중국산 의존도를 당장 다른 국가로 다변화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국내 생산기반이 중요하다. 비록, 당장 국내 생산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다 하더라도 피해서는 안 된다. 요소의 경우, 한때 국내생산업체가 있었지만 2010년대 초반에 문을 닫았다. 수입품과의 가격경쟁력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자체 요소 공급 시스템을 갖춘 유럽연합(EU)은 마치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준비한 듯하다. 보조금을 기반으로 하는 국내생산기반 확보를 주장하는 산업정책을 시대착오적인 구상으로 치부했던 시대는 급속하게 막을 내리고 있다.

미국은 G20에서 동맹국 단합대회

더 큰 그림을 보자. 지난달 30~31일 로마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별도의 소규모 회의를 소집했다. 참석한 국가들의 면면을 보자. 영국·독일·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국가, 쿼드(Quad) 참여국인 일본·호주·인도, 그리고 한국·싱가포르·캐나다 등 미국의 동맹국들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물류 대란을 해결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속내는 로마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단합대회였다.

이 자리에서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공급만을 특정 국가에서 의존하지 않고 다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강제노동과 아동노동을 단절해야 한다”고 중국을 정조준했다. 논란의 대상이 중국 신장 지역의 강제노동·아동노동을 겨냥한 것이다.

로마 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EU와 전격적으로 철강·알루미늄 관세 분쟁을 타결한 직후였다. 외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약속한 것보다 더 높은 관세를 매긴 전임 트럼프 대통령이 걸었던 빗장을 풀었다. 한 동맹국의 철강·알루미늄 수입이 다른 동맹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정신분열적인 망상에 근거한 트럼프의 고관세는 바이든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면서 원상회복되는 것은 순리이리라.

바이든은 트럼프의 고관세를 모든 동맹국을 상대로 즉시 원상회복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그것도 협상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EU가 그 첫 번째 상대였다는 것은 중국 견제를 위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그만큼 EU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 철강 쿼터제 협상 나설 듯

철강·알루미늄 관세 분쟁 타결 합의에서 바이든은 “중국과 같은 나라의 더러운(dirty) 철강이 미국시장에 수입되는 것을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합의에 대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동맹국과 21세기 새로운 규칙을 작성할 기회를 갖게 됐다”고 했다. 경제보좌관이 아닌 안보보좌관이 경제를 안보의 논리로 다루고 있음을 눈여겨보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영국과 철강·알루미늄 관세 협상을 추진한다고 한다. 2018년 한·미 FTA 재 협상 과정에서 철강 관세 25%를 면제받는 대신 철강 고관세 부과 전 3년간의 대(對)미국 철강 수출 평균 물량의 70%까지만 미국에 수출하는 쿼터제를 협상한 한국 역시 협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글로벌 공급망은 비용 최소화 패러다임에서 안정성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를 이끄는 근본구조는 미·중 패권경쟁이고, 코로나 팬데믹이 이를 더 강화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극복되더라도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류의 전염성 강한 보건 충격이 생길 수 있고, 여기에 사전 대비를 해야 한다는 확신을 미국 정책당국자들은 가지고 있다.

비용 최소화라는 경제적 효율성을 지고 지선의 가치로 숭상하던 시대에 구축됐던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산업과 안보, 양쪽으로 사용되는 기술·소재일수록 그 요구는 더 강하다.

중국의 경제 패권, 한국 정부는 대응책 있나

중국이 야심을 노골화하기 전, 화평굴기(和平崛起) 시절에는 외국기업들이 중국에 공장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중국에 최종 조립 공장을 세우고, 그에 필요한 부품과 소재는 외국에서 중국으로 들여오는 ‘중국 공장’ 모델을 너나없이 따라 했다. 애플의 아이폰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 공장 모델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첫째, 외국에서 중국으로 부품을 수입할 때 중국이 새로운 과도한 규제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둘째, 중국에서 생산된 완제품이 최대 시장인 미국으로 수출할 때 제약이 없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규제가 생길 수 있지만, 그 규제가 과도하여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장애를 유발한다면, 세계무역기구(WTO)에 분쟁을 제기할 수 있다.  WTO 분쟁 해결은 최종 판정까지 2년 이상 소요된다. 그래도 세계무역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은 WTO 분쟁 자체를 가급적 회피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새로운 규제는 가급적 WTO 규범과 합치되는 쪽으로 만들어질 것이리라, 이런 생각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중국에서 조립된 완제품을 미국이 수입을 제한하거나, 중국이 수출을 제한한다는 것 역시 상상 바깥의 영역이었다. 미국의 수입제한은 미국의 물가상승을, 중국의 수출제한은 일자리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 경제적 합리성의 시대 역시 사라지고 있다. 패권을 이유로, 안보를 구실로, 효율성을 최전선에 내세우는 경제논리는 미국과 중국의 정책 담론에서 밀려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움직임은 통상대국인 한국에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다. 경제논리가 압도하던 시대에서 안보가 경제를 지배하는 시대로의 전환을 우리 정치인과 정책담당자는 제대로 꿰뚫고 있을까. 날로 드세지는 중국의 경제 민족주의 경향은 그간 중국에 핵심 제조역량을 구축한 한국 기업들에 성찰과 전략 재조정을 요구한다. 새로운 전략이 만들어질 때까지 과도기에서 발생하는 분쟁은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정부는 마냥 “기업 일은 기업이 알아서 한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할 수 없다. 안보 논리가 경제 논리와 연계되는 시대를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는 기업의 외국투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경제의 핵심역량을 보호하지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