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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공약 이후 4년…과학기술계, 인재 선발도 빨간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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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한국 정치에서 과학기술은 장식품이다. 구호가 공약이 되면, 온 나라를 덮어버린다. 세계 패권은 지정학(地政學)이 아닌 과학기술이 결정짓는 기정학(技政學)의 시대가 됐지만, 21세기 한국은 예외다. 정치가의 공약에 ‘과학계는 잔말 말고 따라와’가 돼 버렸다. 과학기술계의 블라인드 채용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얘기다. 두 가지 모두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2017년부터 시행됐다. ‘공정한 기회’라는  취지에 몰두하다 보니 뛰어난 인재를 뽑아 연구·개발(R&D)에 주력해야 하는 과학기술 부문과 도무지 맞지 않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묶인 출연연·대학들은 필요한 인재를 제대로 뽑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블라인드 채용 역시, 지원자의 자세한 배경을 알 수 없다 보니 좋은 연구자를 선발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

KAIST에서 첨단 바이오 장비들을 운영하는 바이오코어센터가 올해를 끝으로 ‘폭파’된다. 박사급을 포함한 연구원 5명은 오는 12월 말부로 전원 해고될 예정이다. 이들 중 1명은 이미 기업체로 자리를 옮겼고 나머지는 이직을 고민 중이다. 바이오코어센터는 유전체·바이오이미징 등 4대 필수 바이오 분석 첨단장비와 전문 운영 인력을 갖춘 곳이다. KAIST 내부는 물론 외부 연구자들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바이오코어센터의 전문 운영인력의 지원을 받고 훌륭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정규직화, 우수 인재 방출하는 역설
블라인드 채용, 중국국적 못 걸러내
“인재는 채용 아닌 영입하는 것”
국회, 개선안 놓고도 2년간 표류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원인은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과 고용안정법 때문이다. 법에 따르면 2년 이상 고용한 비정규직원은 반드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에 부담을 느낀 정부출연기관들은 비정규직원을 2년이 되기 전에 내보내기 위해 고용 때 각서를 쓰게 하는 등 내규를 정해 정규직화를 막고 있다. 필요한 만큼 정규직을 뽑으면 좋지만, 기관의 예산 규모로 감당키 어렵다. 비정규직으로 2년을 활용하다가 꼭 필요한 인재만을 정규직화하는 방안이 최선이나 현장에선 적절하게 운용되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계는 블라인드 채용의 일괄 적용을 반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말 한국전력이 우수사례 기획재정부 장관상을 받는 모습. [뉴스1]

과학기술계는 블라인드 채용의 일괄 적용을 반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말 한국전력이 우수사례 기획재정부 장관상을 받는 모습. [뉴스1]

센터장 사표를 낸 김대수 교수는 “예전 같으면 연구원들의 계약을 계속 연장하는 방법으로 고용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게 됐다”며 “법의 취지는 비정규직 중 필요한 사람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는 것인데 현장에서는 반대로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제도에는 사각지대와 모순이 있어 조율이 필요한데 현장의 상황을 외면한 법 집행으로 인해 훌륭한 동료가 KAIST를 떠나야 한다니 통탄할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이슈는 KAIST뿐이 아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2019년 379명에 달하는 정규직 전환 ‘성과’를 올렸다가, 지금까지 분란에 휩싸여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연구원을 급이 낮은 ‘기술원’으로 분류해, 또 다른 차별을 낳았다. 한꺼번에 정규직 전환을 많이 하다 보니, 연구원 정규직 공채를 기다리던 지망생들이 기회가 사라진 건 생산기술연구원뿐 아니라 모든 출연연에 해당되는 사안이다.

블라인드 채용도 과학기술 분야를 어렵게 하는 제도다. 과기계는 블라인드 채용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2년 전 대안까지 내놓았지만, 한 발짝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2019년 말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하반기 연구직 공개채용 과정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서류와 면접 등을 통해 최종 면접단계까지 올라온 사람이 중국 국적자인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원은 가급 국가보안시설이라 외국 국적자가 정식 연구원이 될 수 없다.  당시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면접 과정에서 해당 지원자의 한국어가 워낙 유창해 중국 국적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며 “블라인드 채용을 하다 보니 출신 국적이나 지역은 물론 출신 대학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해당 연구자는 중국에서 학부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건너와 KAIST 대학원에 입학, 기계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자력연구원은 2개월여의 고민 끝에 결국 이 연구자를 최종 불합격 처리했다.

과기출연연 블라인드 채용제도 개선방안

과기출연연 블라인드 채용제도 개선방안

이후 원자력연구원의 중국 국적 연구자 채용 해프닝은 과학기술 부문 정부 출연연구소의 블라인드 채용제도 개편 시도의 출발점이 됐다. 당시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인재는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입하는 것”이라며 “적어도 과학기술 부문에서는 현재의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연구회가 마련한 출연연 맞춤형 블라인드 채용방안은 직원 공개채용 때 ① 이력서 등에 출신학교를 명기할 수 있고 ② 추천인 및 추천서 제출을 허용하며 ③ 외부위원 선정 제한도 완화하는 방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권한을 쥔 고용노동부가 제도의 취지를 흐린다는 이유로 반대, 지금껏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대선공약에 반하는 연구회의 개정안은 집권여당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대신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월 ‘정부출연연구기관 블라인드 채용 완화법’을 대표발의했지만, 소위원회 통과도 못하고 있다.

조명희 의원은 “미국·독일 등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에서는 한 명의 탁월한 연구자를 뽑기 위해 출신학교, 연구성과 등을 보고 거액 스카우트 전까지 불사하는데, 한국은 대통령 공약에 과기계가 희생당하고 있다”며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연구개발 인력의 전문성 확보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