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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치인의 정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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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차세현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1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창단 8년밖에 안 된 kt wiz의 4연승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해 아홉 번째 신생 구단인 NC 다이노스에 이어 올해는 막내 구단 kt가 원년 멤버 두산 베어스를 꺾고 마법 같은 우승을 해냈다. 코로나19로 침체됐던 한국 프로야구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신호탄이다.

늦가을 그라운드에는 환호가 넘쳐나지만 다른 한켠에는 눈물의 현장도 있다. 가을야구가 끝나기도 전 각 구단은 방출 선수 명단을 발표했다. 내년에 새로 들어올 젊은 피를 수혈하려면 누군가는 자리를 비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10개 팀에서 100명을 훌쩍 넘긴 방출 선수들은 이제 새 팀을 찾거나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야 한다.

윤석열 선대위의 올드보이 귀환
지지율 상승에 탄핵기억 잊은듯
보수혁신, 중도포용 인사와 정책
100여일 남은 3월 대선의 승부처

이런 프로 스포츠와는 달리 정년이 없는 시장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섰다. 선거철 올드보이들이 부활하는 정치 시장이다. 윤석열 후보를 대선후보로 선출한 국민의힘은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연히 선대위 핵심 포스트에 보수 혁신과 중도·합리적 진보 포용을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올드보이의 귀환 소식이 들려온다. 후보 선출 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앞서는 결과가 나오자 이미 반쯤 승리한 줄 아는 걸까. 20·30세대의 표를 얻겠다면서 올드보이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정치 초년생 윤석열 후보의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심으로 치른 지난 후보 경선 결과를 보라. 윤 후보는 민심이 반영된 비당원 여론조사에서 홍준표 후보에게 10% 포인트 이상 차이로 졌다. 이런데도 올드보이를 배려하는 건 당심에서 역전한 윤 후보가 단단히 신세를 갚는 거로 비칠 수밖에 없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지금 선대위 주요 자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 중 상당수는 5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 속에서 당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는 와중에 제 몸 하나 겨우 추슬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반문(反文) 빅텐트’의 터줏대감 노릇을 할 기세다.

아직 최종 인선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그간의 경험을 살려 2선에서 윤 후보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벌써 세간에서는 윤석열 선대위를 두고 친이와 친박, 비문 올드보이들의 결합체니, ‘이명박 선대위’나 ‘박근혜 선대위’와 뭐가 다르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2017년 탄핵 이후 지난 5년간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보수 변화의 장면은 세 가지다. ‘0선’의 30대 이준석 당 대표 선출, 책임정치를 실천한 초선 윤희숙 의원의 전격 사퇴, 정권 교체를 위해 한때 당의 얼굴이었던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사람을 대선후보로 선택한 보수진영의 고육지책이다.

올해 국민의힘이 만들어낸 이 세 장면은 2004년 ‘차떼기당’의 오명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무너져내린 한나라당이 당 간판을 떼고 천막당사를 칠 때만큼의 사건이었다. 지금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재창출 여론을 압도하는 건 이런 처절한 변화의 몸부림 덕분이다.

그런데 불과 몇달 만에 선대위 구성을 놓고 ‘자리 사냥꾼’ ‘하이에나’ ‘파리떼’ 등 온갖 혐오의 표현들이 난무한다. 대선에서 승리하면 정권 인수위를 거쳐 다음 정부 파워 그룹으로 떠오를 선대위에 또다시 올드보이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내년 3월 9일 대선까진 아직 100일이 넘게 남았다. 갈 길이 멀다. 앞으로 사선을 넘나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윤석열 선대위는 여러 번 위기를 맞을 것이다. 지지율 답보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변신 중인 승부사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16년간 독일을 이끌었던 1954년생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스스로 정년 연장을 포기했다. 메르켈 총리는 정치를 못 해서 물러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업적에 대한 전 세계 전·현직 지도자들의 칭송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자리를 비워줘야 비로소 그 자리에 앉을 새 사람이 등장할 수 있어서다.

최근 네이버는 1981년생 신임 CEO를 선택하는 파격 인사를 했다. 국내 시가총액 3위까지 오르게 했던 네이버의 빛나는 성공 전략이 더이상 기후변화와 빅테크, 전기차, 메타버스와 NFT 세상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강의 뒷물은 앞물을 밀어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나는 내년 대선만큼이나 새 얼굴들이 땀과 열정으로 그라운드를 달굴 4월 프로야구 2022시즌 개막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