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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한 장 한 장 결대로 떠내 우수한 품질…천년 가는 우리 종이, 한지

중앙일보

입력

소품·옷 만들고 바티칸 문화재 복원에도 쓰고 한지의 확장성 어디까지일까  

한지(韓紙)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서예 시간에 글씨를 쓰던 기억이나 박물관 진열장 속 유물이 생각날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한지를 단순히 '우리의 전통 종이'나 '옛것'과 관련 짓지는 마세요. 미술 작품 복원부터 생활 소품을 만드는 재료까지 그 응용 범위가 꽤 다양하답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6년 이탈리아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어요. 우리 전통 종이인 한지가 바티칸의 기록 문화재 복원에 활용된다는 사실이었죠. 이 소식의 주인공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인 장용훈 지장과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경기도 가평군의 종이공장, 장지방의 한지였어요. 4대에 걸쳐 120여 년을 똑같은 재료와 방식을 고집해 전통 한지를 만들어 온 곳입니다.

김해승(충북 청천초 4) 학생기자·노윤채(서울 명덕초 5) 학생모델·홍성택(경기도 솔개초 4) 학생기자(왼쪽부터)가 원주한지테마파크를 찾아 한지의 역사와 활용법에 대해 알아봤다.

김해승(충북 청천초 4) 학생기자·노윤채(서울 명덕초 5) 학생모델·홍성택(경기도 솔개초 4) 학생기자(왼쪽부터)가 원주한지테마파크를 찾아 한지의 역사와 활용법에 대해 알아봤다.

문화재 복원을 위해 전 세계의 종이를 조사한 바티칸 유물복원팀에 따르면, 종이는 섬유소가 길수록 오래 보존되는데 해당 한지의 섬유소가 세계 여러 나라의 종이 중 가장 길었다고 해요. 이들은 장지방의 한지가 최대 8000년까지 보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또한 전통 한지는 부드럽고 질길 뿐만 아니라 제조 과정에서 화학약품을 쓰지 않으니 산화될 걱정도 없어요. 이후 2018년에는 경남 의령 한지가, 2020년에는 전북 전주 한지가 이탈리아 문화재 복원 적합 판정을 받았죠.

유럽에서도 인정받은 한지는 과연 언제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질까요. 또 종이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한지는 어떤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을까요. 김해승·홍성택 학생기자와 노윤채 학생모델이 강원도 원주시 한지공원길에 있는 원주한지테마파크를 찾아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어요.

천 년이 가는 한지에 얽힌 이야기  

소중 학생기자단이 엄미애 해설사와 함께 한지역사실을 둘러보며 한지의 역사와 활용법을 알아봤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엄미애 해설사와 함께 한지역사실을 둘러보며 한지의 역사와 활용법을 알아봤다.

사단법인 한지개발원에서 운영하는 원주한지테마파크는 한지를 주제로 각종 전시·교육·체험을 제공하는 문화공간으로 2010년 조성됐어요. 1층 한지 역사실에서는 한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체험실에서는 한지 뜨기와 한지 공예 체험을,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한지를 응용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먼저 한지 역사실에서 엄미애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 한지의 정의와 역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여러분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에 글자를 입력해서 지식을 저장하고 소통하는 행위가 익숙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불과 수십 년 밖에 되지 않은 일이에요. 수천 년간 인류가 지식을 기록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주요 수단은 종이였죠. 종이는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후 우리 전통 종이인 한지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수천 년을 함께해 오고 있어요.

1966년 10월에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000년 넘게 보관이 가능한 한지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1966년 10월에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000년 넘게 보관이 가능한 한지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에 한지 제조 기술이 발전하게 된 건 불교의 역할이 큽니다. 불교의 진리를 담은 경전이 한지에 인쇄돼 많은 사람에게 전파됐거든요.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국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대표적인 유물이죠. 이 경전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불국사를 고쳐 지으면서 석가탑을 세울 때 봉안된 것입니다. 다라니경은 탑을 쌓은 다음 불경을 되뇌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만드는 경전으로 탑 속에 넣는 게 관행이었죠. 발견 과정도 상당히 극적인데요. 보수 공사 중 탑의 몸체 일부가 무너지면서 폭이 6.7cm, 길이가 6.228m의 경전이 세상에 드러난 겁니다. 작은 함 속 비단에 싸여있던 이 경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한지가 천 년 넘게 보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해요.

"한지는 물에 젖으면 금방 찢어지는데 옛날에 제작된 책들은 오랫동안 남아있더라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유심히 보던 성택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종이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늘지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돼요. 또 한지로 우산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표면에 콩기름을 바르거나 옻칠을 하면 물에 잘 젖지 않아요."(엄) 한지는 천연재료인 닥나무와 잿물, 황촉규(닥풀)를 사용해 제작한 중성지이기 때문에 100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해요. 또 한지를 구성하는 섬유의 조직이 그물처럼 서로 90도로 촘촘히 교차하고 있어 매우 질긴 성질을 갖고 있죠. 그 때문에 종이를 옆으로 찢을 때 견디는 힘과 종이를 위아래로 잡아당길 때 버티는 힘이 우수해요.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 한지를 꼬고 말아서 실로 만든 다음 엮어서 모양을 만드는 지승공예로 탄생한 지승상. 2.지승공예 기법으로 한지실을 꼬아서 만든 지승바구니. 3. 나무로 뼈대를 만들어 안팎으로 종이를 여러 겹 겹쳐 만든 종이 바구니. 4. 버려진 한지를 잘게 찢어 물에 불린 뒤 풀과 섞어 덧붙여 만든 종이 그릇. 5. 벼루·먹·붓·연적 따위를 담아 두는 작은 책상인 연상. 지장공예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6. 한지의 면을 도돌도돌하게 가공해서 제작한 지갑.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 한지를 꼬고 말아서 실로 만든 다음 엮어서 모양을 만드는 지승공예로 탄생한 지승상. 2.지승공예 기법으로 한지실을 꼬아서 만든 지승바구니. 3. 나무로 뼈대를 만들어 안팎으로 종이를 여러 겹 겹쳐 만든 종이 바구니. 4. 버려진 한지를 잘게 찢어 물에 불린 뒤 풀과 섞어 덧붙여 만든 종이 그릇. 5. 벼루·먹·붓·연적 따위를 담아 두는 작은 책상인 연상. 지장공예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6. 한지의 면을 도돌도돌하게 가공해서 제작한 지갑.

"그런데 우리 전통 종이의 이름이 왜 한지인가요?" 엄 해설사의 설명을 듣던 해승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한지(韓紙)란 ‘우리나라 종이’라는 뜻으로, 닥나무를 주재료로 물과 닥풀을 혼합하고 ‘한지발’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손으로 떠낸 종이를 말해요."(엄) 한지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엄 해설사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종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찰 한(寒)을 사용해서 한지(寒紙)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죠. 한지는 한창 농사로 바쁜 봄~가을보다 농사에 노동력이 덜 필요한 겨울(11월~이듬해 2월)에 어린 닥나무를 수확해 그 껍질로 만들기 때문이에요. 추운 겨울 베어낸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가 품질이 좋고 우수하거든요. 또 닥풀은 온도가 너무 높으면 끈적한 성질이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죠.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서양에서 들여온 양지(洋紙)와 한지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윤채 학생모델이 물었어요. "양지는 주로 기계적·화학적 처리 과정을 거쳐 식물체의 섬유를 추출한 펄프(pulp)로 만들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죠. 반면 전통적 방식으로 제작된 한지는 화학 첨가물을 넣지 않고, 한 장 한 장 사람이 손으로 떠서 만들어요. 요즘 문구점에서 파는 한지는 양지처럼 기계로 만들고, 제조 과정에서 화학 제품이 들어가기도 해요."(엄)

한지를 만들 때 쓰는 주재료인 닥나무 껍질.

한지를 만들 때 쓰는 주재료인 닥나무 껍질.

백 번의 정성으로 탄생하는 한 장의 한지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제작하려면 먼저 백닥(백피)을 확보해야 합니다. "초겨울에 잎이 떨어진 닥나무를 채취해서 솥에 찌면 껍질만 따로 벗겨낼 수 있어요. 껍질 안쪽은 하얀색인데, 이게 바로 최고급 한지의 재료인 백닥이죠. 백닥을 얻으려면 칼로 겉껍질을 일일이 다 제거해야 해요. 백닥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잘 마른 백닥을 다시 하루나 이틀 동안 차고 맑은 냇물에 담가서 불리죠. 그리고 30~40cm 길이로 적당히 잘라 메밀대·콩대·짚을 태운 잿물과 함께 솥에 넣고 4~5시간 동안 푹 삶습니다. 잿물은 백닥의 섬유를 지나치게 파괴하지 않고 광택을 내는 역할을 해요. 잘 삶은 백닥은 다시 냇물에 며칠 동안 담가 햇볕을 쐬어 표백하죠. 이후 불순물을 골라낸 백닥을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40~60분 정도 두들겨 찧어요. 이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조선 시대에는 죄인들에게 형벌로 이 일을 시키기도 했다고 해요."(엄) 이 단계를 거치면 백닥이 종이가 되기 직전 단계인 닥섬유가 됩니다. 닥섬유를 물에 풀어 큰 나무통, 일명 지통(紙筒)에 넣고 대나무 막대로 저어서 잘 풀어준 다음 황촉규라는 식물의 액(닥풀)을 넣어 긴 닥나무 섬유가 서로 엉키지 않게 하면 종이를 뜰 준비가 끝나요. 이후 지통에 네모난 틀을 집어넣어 종이 모양으로 뜬 뒤 물을 빼서 말리면 한지가 되죠.

닥섬유는 한지를 뜰 때마다 막대로 휘휘 저어 한지 뜨기용 틀에 골고루 올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닥섬유는 한지를 뜰 때마다 막대로 휘휘 저어 한지 뜨기용 틀에 골고루 올릴 수 있게 해야 한다.

"한지가 한 장 나오기까지 손이 백 번 간다고 해서 백지라고도 해요." 엄 해설사의 설명을 듣기만 해도 한지 제작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종이 뜨기 단계부터는 한지 체험실에서 직접 해볼 수 있어요. 원주한지테마파크 기획팀 체험담당 신다희 사원이 먼저 시범을 보였죠. 그는 닥섬유가 그득히 담긴 지통에 대나무 막대를 넣고 휘휘 저었어요. "뭉쳐있는 닥섬유를 풀어주는 과정이에요. 닥섬유가 일정한 농도가 되면 네모난 틀을 통 안에 넣어 '슥' 떠주세요. 그리고 물이 빠질 때까지 두 번 정도 흔들어 줍니다. 그러면 틀 안에 깔린 대나무로 만든 한지발에 축축한 종이(습지) 형태가 된 닥섬유만 남게 되죠. 한지발을 꺼내서 양파망처럼 생긴 '샤' 위에 닥섬유 부분이 맞닿게 올려주세요."(신)

지통에서 한지 뜨기용 틀로 닥섬유를 건져내는 중인 홍성택 학생기자.

지통에서 한지 뜨기용 틀로 닥섬유를 건져내는 중인 홍성택 학생기자.

참고로 옛날에는 습지 사이에 '샤' 대신 왕골을 끼워 나중에 떼어내기 좋게 했답니다." 이후 한지발을 손으로 쓱쓱 눌러가면서 남아있는 물기를 빼주고, 샤를 들어서 닥섬유 부분이 열판에 닿도록 붙입니다. 브러시로 샤의 표면을 가로 방향으로 골고루 솔질해주면 닥섬유가 열판에 밀착되죠. 이대로 건조하면 완성입니다.

 두 장의 한지 사이에 문양이 들어가는 문양 뜨기는 닥섬유를 떠서 말리는 과정을 두 번 반복한다. 그 아름다움으로 다양한 공예 분야에 활용된다.

두 장의 한지 사이에 문양이 들어가는 문양 뜨기는 닥섬유를 떠서 말리는 과정을 두 번 반복한다. 그 아름다움으로 다양한 공예 분야에 활용된다.

신 사원의 시범과 설명을 들은 소중 학생기자단도 한지 만들기를 시작했어요. 해승 학생기자는 한지에 여러 가지 문양을 넣는 문양 뜨기를, 성택 학생기자와 윤채 학생모델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형태의 흰 한지를 만드는 순지 뜨기를 해봤죠. 지통을 대나무 막대로 휘휘 젓고, 한지 뜨기용 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아 통 안의 닥섬유를 건지고, 한지발을 샤에 올린 뒤 물기를 빼는 과정까지는 같아요. 이후 문양 뜨기는 한지를 오려 만든 여러 가지 문양을 샤 위에 놓아둔 닥섬유에 올리고, 다시 한 번 닥섬유를 틀로 건져서 한지발에 올린 뒤 문양 위로 덮어주죠. 즉, 두 장의 습지 사이에 문양이 끼어 있는 형태가 되는 겁니다. 열판 위에 닥섬유를 밀착할 때는 뜨거운 열기와 온도 때문에 화상을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제가 직접 한지를 만들다니 신기해요." 서로 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열심히 지켜보던 소중 학생기자단이 각자 손에 미세하게 열기를 전해주는 한지를 들여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어요.

 다양한 한지를 활용해 직접 한지 만들기에 도전한 소중 학생기자단.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한지는 손이 백 번 간다고 하여 '백지'로도 불렸다.

다양한 한지를 활용해 직접 한지 만들기에 도전한 소중 학생기자단.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한지는 손이 백 번 간다고 하여 '백지'로도 불렸다.

생활 소품부터 미술 작품까지, 한지의 무한한 확장성  

한옥이나 초가집의 문을 보면 흰색 종이가 발라져있죠. 이것의 정체는 창호지예요. 표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바람과 빛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데 탁월하죠. 그래서 창호지를 '살아있는 종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우리 선조들은 창호지를 비롯해 다양한 생활용품을 한지로 만들어 썼어요. 각종 문서류는 물론 비가 올 때 쓰는 우산, 햇볕을 가리는 양산, 병풍, 지갑, 부채, 반짇고리까지 한지로 만들었죠. 일상 생활에 한지가 정말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건데요. 물에 젖으면 찢어지는 한지가 이렇게 다양한 소품의 재료가 된 비결은 조선시대에 작성된 한 기록을 살펴보면 짐작이 됩니다. 『인조실록』 16권에는 병조판서가 군사훈련과 갑옷 수선, 무기 등에 대해 인조에게 보고하는 구절이 등장해요.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던 갈모. 비에 젖지 않도록 한지에 기름을 발라 만들었다. 2.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冠)의 하나인 탕건을 보관하는 통. 한지는 통기성이 좋아 상자 형태로 만들면 물건 보관에 용이하다. 3. 밤거리를 걷을 때 들던 조족등. 대나무 가지로 둥근 틀을 만들고 기름을 먹인 한지로 감싸 비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4. 갓을 보관하는 한지 갓집.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르거나 두꺼운 한지로 모양을 만든 뒤 한지를 발라 만든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던 갈모. 비에 젖지 않도록 한지에 기름을 발라 만들었다. 2.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冠)의 하나인 탕건을 보관하는 통. 한지는 통기성이 좋아 상자 형태로 만들면 물건 보관에 용이하다. 3. 밤거리를 걷을 때 들던 조족등. 대나무 가지로 둥근 틀을 만들고 기름을 먹인 한지로 감싸 비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4. 갓을 보관하는 한지 갓집.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르거나 두꺼운 한지로 모양을 만든 뒤 한지를 발라 만든다.

"오늘날의 급무는 군사를 교련하고 갑옷을 수선하는 일입니다. 대개 철갑은 무겁고 차가워 추위에 입을 수 없고 지갑(紙甲)은 가볍고 따스하여 추위를 막기에 충분할 뿐더러 철갑에 비해 공력이나 재료가 십 배나 덜할 뿐만이 아닙니다. 별조청(別造廳)으로 하여금 각도에서 송지(松脂)를 올려보내기를 기다려 1000여 부를 만들게 하소서."

여기서 언급한 '지갑'은 종이, 즉 한지로 만든 갑옷을 뜻해요. 칼과 화살을 막아야 하는 갑옷을 한지로 만들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한지를 송진이나 아교 등 접착제로 겹겹이 붙인 뒤 옻칠을 하면 가능해요. 그러면 무게는 가볍지만 내구력은 쇠 못지 않은 종이 갑옷이 탄생하는 거죠. 조선시대에 지갑은 꽤 흔한 형태의 갑옷이었는데, 제작 과정에서 13겹 이상의 한지가 쓰였다고 합니다.

 한지사로 만든 드레스와 한복, 넥타이 등 다양한 의상은 여러 패션쇼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한지 의류는 종이의 특성상 물에 약할 것 같지만 세탁도 가능하다. 한지문화제위원회

한지사로 만든 드레스와 한복, 넥타이 등 다양한 의상은 여러 패션쇼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한지 의류는 종이의 특성상 물에 약할 것 같지만 세탁도 가능하다. 한지문화제위원회

현대에 들어서도 한지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어요. 한지를 얇게 잘라 꼬아 만든 한지사(韓紙絲)에 면·마·실크 등을 혼합해 한복과 드레스 등 고급 의류를 만들기도 하죠. 언뜻 생각하면 물에 약할 것 같지만, 세탁하면 할수록 편한 곡선이 드러나고 부드러워지는 장점이 있다고 해요. 또 한지는 사진을 출력할 때 필요한 인화지로도 써요. 일반적인 인화지는 코팅이 돼 있어 잉크가 인화지 위에 떠 있죠. 반면 한지는 잉크를 그대로 흡수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변색이 적어요. 항균성과 통풍성이 뛰어난 성질을 이용해 공기 청정기 필터로 개발되기도 했죠. 밀도가 촘촘하고 소리를 빨아들이는 특성을 이용해 스피커 진동판의 소재가 되기도 해요. 조명갓이나 물건 수납함, 인형 등 아기자기한 소품 제작에도 쓰이죠.

 원주한지테마파크에서는 한지를 활용한 다양한 생활 소품도 직접 만들 수 있다.

원주한지테마파크에서는 한지를 활용한 다양한 생활 소품도 직접 만들 수 있다.

소중 학생기자단도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이 가능한 한지로 일상생활에서 쓸 소품을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해승 학생기자는 꿩이 꽃과 함께 있는 모빌을, 윤채 학생모델은 디퓨저에 꽂는 연보라색 꽃 장식을, 성택 학생기자는 붉은색 바탕의 문양 보석함을 골랐죠.

 김해승 학생기자가 만든 한지를 염색한 색지로 만든 모빌.

김해승 학생기자가 만든 한지를 염색한 색지로 만든 모빌.

해승 학생기자는 모빌을 만들기 위해 한지를 도안대로 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틀에 붙이고 끈을 달아주면 되는데, 도안의 모양이 조금 복잡하기 때문에 미리 그려놓은 점선을 따라 섬세하게 가위질을 해야 하죠. 여러 색깔의 한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헷갈릴 수도 있지만 도안마다 필요한 한지의 색깔을 다 표시해놨기 때문에 눈에 익으면 어렵지 않아요. 열심히 완성본을 보며 도안을 오리고 틀에 붙이니 약 40분 만에 모빌이 완성됐어요. 밖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지만 꽃과 함께 있는 꿩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화사해지는 기분이네요. "한지를 도안에 맞춰 자르는 것은 오래 걸렸지만 한지를 모빌 틀에 붙이는 건 정말 쉽고 재미있네요."(김)

 노윤채 학생모델이 만든 디퓨저용 꽃 장식. 핑킹가위로 둥글게 자른 한지를 긴 삼각형 모양으로 계속 접어서 여러 장의 꽃잎이 붙어있는 모양을 만들어 준 뒤, 꽃잎 모양 한지를 두툼하게 겹치면 풍성한 꽃잎 장식이 완성된다.

노윤채 학생모델이 만든 디퓨저용 꽃 장식. 핑킹가위로 둥글게 자른 한지를 긴 삼각형 모양으로 계속 접어서 여러 장의 꽃잎이 붙어있는 모양을 만들어 준 뒤, 꽃잎 모양 한지를 두툼하게 겹치면 풍성한 꽃잎 장식이 완성된다.

윤채 학생모델은 핑킹가위로 둥글게 자른 연보라색 한지 7장을 긴 삼각형 모양으로 조금씩 접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을 계속하자 접어둔 장우산의 형태를 닮은 7장의 꽃잎이 탄생했어요. 나뭇가지 역할을 할 막대 끝에 양면테이프를 감싼 뒤, 꽃잎 한 장을 집어 들어 중앙을 막대로 뚫어서 양면테이프가 있는 부분에 고정합니다. 이후 목공풀로 꽃잎을 겹겹이 쌓듯이 덧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면 카네이션을 닮은 보라색 꽃이 되죠. 여기에 녹색 한지를 꽃받침으로 붙입니다. 마지막으로 녹색 테이프를 막대에 비스듬한 방향으로 돌돌 감아주면 줄기까지 완성되죠. "처음에는 꽃잎을 접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속도가 안 났는데, 익숙해지니 재미있어요." 윤채 학생모델이 양 볼 옆에 두 송이의 꽃을 갖다 대고 활짝 웃으며 말했어요.

 홍성택 학생기자가 만든 보석함. 색지는 화려한 색감 덕분에 포인트가 될 소품을 만들기 적합하다.

홍성택 학생기자가 만든 보석함. 색지는 화려한 색감 덕분에 포인트가 될 소품을 만들기 적합하다.

성택 학생기자는 미리 만들어둔 상자 표면에 붉은색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흰색 문양을 덧붙였어요. 처음에는 간단해 보였는데 여러 개의 면에 꼼꼼하게 풀칠을 하고 문양까지 적절한 위치에 붙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죠. "아이고, 바닥 부분 붙이는 걸 깜박했어요." 드라이기로 보석함에 잔뜩 묻은 풀을 말리려던 성택 학생기자가 다시 자리에 앉았어요. 잘 보이지 않아 잊고 있었던 바닥까지 꼼꼼하게 붉은색 한지를 덮으니 나만의 보석함이 탄생했죠. "여기에 제 소중한 물건을 보관해야겠어요." 성택 학생기자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기획전시실에서 한지를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종이여행 Ⅲ - 530間'을 관람한 소중 학생기자단.

기획전시실에서 한지를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종이여행 Ⅲ - 530間'을 관람한 소중 학생기자단.

한지를 뜨고, 한지 공예품도 만든 소중 학생기자단은 2층 기획전시실로 향했습니다. 한지를 비롯한 종이가 기록 매체라는 특성을 넘어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죠. '한지는 예스러운 전통 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좋은 공간이랍니다. 이날 소중 학생기자단은 강원도 내 한지 작가 24명이 각각 가로 530cm 벽에 다채롭고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종이여행 Ⅲ - 530間'을 감상했죠. 한지 전통공예의 변형과 확장, 한지와 미디어 아트의 접목을 보여주는 작품이 가득했어요.

 '종이여행 Ⅲ - 530間'에서 전시된 조병국 작가의 '동백꽃' 시리즈 중 일부. 찢고 두드린 한지를 캔버스에 얹어 마치 유화물감을 사용한 듯한 입체감을 줬다.

'종이여행 Ⅲ - 530間'에서 전시된 조병국 작가의 '동백꽃' 시리즈 중 일부. 찢고 두드린 한지를 캔버스에 얹어 마치 유화물감을 사용한 듯한 입체감을 줬다.

예를 들어 조병국 작가의 '자작나무'와 '동백꽃' 시리즈는 멀리서 보면 유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 한지를 붙여서 작업한 겁니다. 또 봄날의 꿈을 표현한 이부옥 작가의 작품은 한지로 만든 꽃을 낚싯줄에 매달아 천장에 건 뒤, 역시 한지로 만든 등을 주변에 배치해 주변을 환하게 밝힌 형태였죠. 그 앞에 서니 마치 꽃이 떠다니는 하늘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우와, 전부 일반적인 현대 미술 작품인 줄 알았는데 한지로 만든 거라니 정말 신기해요." 취재에 열중하던 소중 학생기자단이 일제히 휴대전화 카메라로 마음에 드는 작품 찍기에 나섰어요. 고요하던 전시실 안이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로 가득 찼죠. 아쉽게도 '종이여행 Ⅲ - 530間'은 11월 14일 막을 내렸지만, 이곳에선 앞으로도 한지를 소재로 한 다양한 주제의 전시를 만날 수 있어요.

한지의 탄생부터 역사와 제작 방법, 그리고 한지로 만든 다양한 물건들과 미술 작품까지. 소중 학생기자단과 함께 한지의 세계로 떠난 여행 어땠나요. 서예용 종이, 사극에만 등장하는 전통 종이인 줄로만 알았던 한지가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 나가야 할 귀중한 자산이랍니다. 앞으로는 한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친해져 보는 건 어떨까요.

전통 한지 공예의 종류

지승 공예: 한지를 꼬고 말아서 실로 만든 다음 그 실을 엮어서 물품을 만드는 것. 실로 무늬를 엮는 방법에 따라 그 모양과 형태가 달라진다. 다채로운 표현을 위해 실에 색지를 섞기도 한다. 제기류·돗자리·화병·찻상·망태기·지갑류·그릇류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을 만들 수 있다(윗줄 왼쪽 사진).

지호 공예: 버려진 한지를 잘게 찢어 물에 불린 뒤 풀과 섞어 종이 반죽을 만든 뒤, 틀에 붓거나 이겨서 물건을 만드는 것. 이렇게 만든 기물은 말린 후에 한지를 덧바르고 콩물을 먹이거나 옻칠을 하여 완성한다(아랫줄 왼쪽 사진).

지장 공예: 나무로 만든 뼈대 안팎으로 종이를 여러 겹 발라 형태를 완성하는 것. 종이에 콩물이나 감물, 옻칠 등으로 마감하기도 하고, 그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색지 공예: 한지를 여러 겹 덧발라 만든 틀에 다양한 색지로 옷을 입힌 후 그 위에 여러 문양을 붙여서 제작하며 한국의 전통 색상인 오방색(황·청·백·적·흑)이 많이 쓰인다(윗줄 오른쪽 사진).

지화 공예: 한지로 생화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꽃 모양을 만드는 것. 상여 장식, 장원 급제자에게 하사하는 어사화에 장식하는 꽃이 바로 한지로 만든 지화(紙花)다(아랫줄 오른쪽 사진).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엄미애 해설사님이 여러 설명을 해주시고 저희의 질문에 답해주셔서, 한지에 관한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1층 종이 체험실에서는 직접 한지를 만들어봤죠. 한지를 뜨고, 판 위에서 말리고 떼어내는 작업까지 하고 나니 혼자서 한지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뿌듯했어요. 한지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한지로 모빌도 만들면서 한지로 이렇게 다양한 공예품과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다음에 한지로 다른 것도 많이 만들어 보고 싶어요. 2층 기획전시실에서 본 '종이여행 Ⅲ - 530間'에서는 한지로 만든 여러 작품을 만났어요. 어떤 작품은 한지로 꽃을 만들었는데 꽃의 섬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했더라고요. 또 어떤 작품은 멀리서 봤을 때 진짜 그림인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한지를 붙여서 만든 작품이어서 정말 신기했어요. 앞으로 한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지가 옛날부터 이어오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을 많이 알리고 싶어요.

김해승(충북 청천초 4) 학생기자

원주에 한지테마파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랐어요. 한지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1층에서 상설 전시를 관람했는데 제작과정을 한지 인형으로 재현해놓고 그 위에 글로 설명을 해둬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좋았어요. 한지가 한 장 나오기까지 손이 백 번 간다고 해서 '백지'라고도 하는데요. 체험실에서 한지 뜨기를 직접 해보니 제작과정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후 한지를 이어 붙여 보석함도 만들었죠. 한지를 이용한 나만의 작품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았고 보석함에 저의 소중한 물건을 보관할 생각이에요. 이번 취재는 한지의 우수성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홍성택(경기도 솔개초 4) 학생기자

평소에도 우리나라 전통공예에 관심이 정말 많았는데 이렇게 한지의 역사와 만드는 방법,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을 해봐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2층 기획전시실에서 '종이여행 Ⅲ - 530間' 전시도 감상했죠. 한지로 만든 그림이나 작품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착각할 정도로 섬세해서 보는 내내 신기했어요. 그리고 몰랐던 한지의 역사에 관해 설명을 듣는 것도 유익했어요. 이번 취재로 인해 우리가 한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전통을 우리 다음 세대까지 이어나가게 해야겠다는 점을 느꼈어요.

노윤채(서울 명덕초 5)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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