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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솨이 미투가 불붙인 베이징올림픽 보이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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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인권을 문제 삼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시사하자 서방 진영에서 잇따라 동조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보리스 존슨 총리도 베이징 올림픽을 외교적으로 보이콧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사설에서 “프랑스 정부도 중국 인권문제 대응 차원에서 이를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르몽드는 “13년 전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미국·유럽은 중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 속도를 낙관적으로 평가하면서 정치적 개방으로 이어질 것으로 믿었다”며 “하지만 현재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주도의 권위주의 정권 앞에 서구의 환상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 인권침해에 항의하기 위해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고려했고, 그 계획은 현실로 옮겨지고 있다”며 “유럽도 신속하게 이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솨이

펑솨이

신문은 특히 지난 2일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35·彭帥·사진)가 장가오리(張高麗·75) 전 국무원 부총리로부터 성폭행당했다는 ‘미투’ 폭로 글을 올린 뒤 행방이 묘연해진 사건이 외교적 보이콧 논의에 촉매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시대적 발상으로 비판자를 침묵시키려는 중국이 국제대회를 열어선 안 된다”며 이번 사건에서 공산당 편에 서지 않거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고전적 관행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펑솨이가 스티브 사이먼 여자테니스협회(WTA) 회장에게 e메일을 보냈고, 공개 석상에 나타났다며 실종설을 반박했다. 하지만 서방 사회는 조작 의혹을 제기하며 안전을 확인할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에선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馬雲), 배우 판빙빙(范氷氷)·자오웨이(趙薇) 등도 한동안 사라진 적이 있다.

르몽드는 이번 폭로가 베이징 올림픽을 두 달 앞두고 터졌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이 사건이 베이징 올림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이콧’ 확산 움직임 … 문 대통령 베이징 평화구상엔 악재

지난 2일 장가오리(張高麗) 전 국무원 부총리의 성관계 강요를 폭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던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彭帥·왼쪽)가 21일 베이징의 필라 키즈 주니어 테니스대회 결승전에 나와 대형 테니스공에 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일 장가오리(張高麗) 전 국무원 부총리의 성관계 강요를 폭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던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彭帥·왼쪽)가 21일 베이징의 필라 키즈 주니어 테니스대회 결승전에 나와 대형 테니스공에 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일부 국제 스포츠 단체도 강경 입장이다. 사이먼 WTA 회장은 “펑솨이의 성폭행 주장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는다면 수억 달러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중국에서 사업을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남·북·미·중 4개국이 한반도 종전을 선언하는 내용의 ‘베이징 구상’에 악재가 쌓이고 있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인권문제를 이유로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고위 당국자를 파견하지 않는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는 데 이어 영국도 동참할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지난 20일(현지시간) “리즈 트러스 영국 외교부 장관이 중국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으며 외교적 보이콧을 찬성하는 입장”이라며 “다만 보리스 존슨 총리는 상대적으로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18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의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올림픽 보이콧 여부를 묻는 말에 “현재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이 확정돼도 해당국 선수단은 경기에 참여할 수 있지만, 국가원수나 고위급 인사 등으로 이뤄진 축하 사절단은 파견되지 않기 때문에 올림픽을 매개로 한 양자·다자 외교 행사는 열리지 못한다.

장가오리

장가오리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외교적 보이콧를 검토하는 이유로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벌어지는 (중국 정부의) 인권 관행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지난 15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상호 경쟁이 충돌로 번지지 않기 위한 ‘상식의 가드레일’을 강조했지만, 미국은 인권문제에 대해선 이와 별개로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영국의 외교적 보이콧 움직임이 유럽연합(EU)·캐나다·호주 등 중국 인권문제를 지적해 온 다른 국가로 확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은 이에 강경 대응으로 맞서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환구시보는 20일자 사설에서 “중국이 지금 내려야 할 결정은 미국 고위급 대표의 올림픽 초청을 (선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역공하고 “그들이 없으면 올림픽은 더 순수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베이징 올림픽을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의 마중물로 활용하려던 문재인 정부는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다. 우선, 미국이 검토 중인 외교적 보이콧에 한국의 동참 여부가 외교적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이 외교적으로 불참할 경우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한 종전선언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미국의 지지와 협력 없이는 남북 정상회담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다만 미국과 영국의 외교적 보이콧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인권문제를 앞세운 외교적 보이콧은 자칫 ‘스포츠를 통한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결정이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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