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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도마 복음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저 새가 먼저 닿을 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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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예수의 제자들은 보챘다. 하느님을 보게 해달라고 예수에게 졸랐다. 빌립은 예수에게 이렇게 매달렸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복음 14장 8절)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이적을 기대했다. 하느님의 사자라는 징표로 이적을 요구했고, 하느님 나라를 보여달라고 했다. [중앙포토]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이적을 기대했다. 하느님의 사자라는 징표로 이적을 요구했고, 하느님 나라를 보여달라고 했다. [중앙포토]

그런 제자에게 예수는 말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복음 14장 10절)

(27) 도마 복음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저 새가 먼저 닿을 터”

예수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손으로 만져야, 귀로 들어야, 눈으로 봐야만 믿는 제자들 앞에서 말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도 공격적인 물음을 던졌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가?”(누가복음 17장 20절)

그들은 따지듯이 물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 오는지, 어디로 오는지 말이다. 이들의 물음에 예수는 종말론으로 답하지 않았다. “OOOO년 0월 0일 0시 하느님 나라가 온다. 그때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예수의 답은 오히려 뜻밖이었다.

나사렛에 있는 수태고지 교회. 이곳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잉태하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한다.

나사렛에 있는 수태고지 교회. 이곳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잉태하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누가복음 17장 20~21절)

이런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맥이 빠지고 실망했을까. 그도 아니면 말문이 막혔을까. 그런데 예수의 대답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답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 그걸 찾는 게 우리의 몫이다.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담은 많은 글 조각들이 있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이에 대한 수집과 선택, 그리고 배제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도마복음’은 4복음서에서 제외됐다. 복음서 중에서도 초기에 제작됐다고 전해지는 문헌이지만 정경(正經)에서 빠졌다. 지금도 그리스도교에서는 도마복음을 외경(外經)이나 위경(僞經)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도마복음에도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예수가 답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장면과 똑 닮았다.

나사렛 수태고지 교회의 내부에 저녁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무척 아름답다.

나사렛 수태고지 교회의 내부에 저녁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무척 아름답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하면 하늘을 나는 새가 너희보다 먼저 닿을 것이요, 천국이 바다에 있는 것이라면 바닷속의 물고기가 너희보다 먼저 닿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또한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그때는 아버지도 너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곧 자신이 살아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러니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옛 선비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추운 겨울을 뚫고 올라오는 매화에는 지조와 기품이 있기 때문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선비들은 매화를 찾아 나섰다. 세상 어딘가에 ‘가장 먼저 핀 매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산을 헤매고 계곡을 헤매도 매화는 없었다. 결국 지쳐버린 선비는 포기한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란다. 자신의 집 뜰에 매화가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무척이나 영성적이었다.

천국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무척이나 영성적이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다. 밖에서 찾으려면 막막하다. 모세가 올랐다는 시나이 산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언약의 궤를 놓아둔 성전의 지성소로 가야 할까. 그도 아니면 히말라야 산의 깊숙한 골짜기로 가야 할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럴 때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안에서 매화가 필 때 나의 바깥에도 매화가 핀다. 도마복음은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또한 너희 밖에 있다”라고 했다. 내 안의 천국을 찾을 때 바깥의 천국도 보인다.

예수는 평화의 뜻도 짚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장 9절)

통하면 평화가 있고, 통하지 않으면 평화도 없다. 남북 관계도 그렇고, 종교 간에도 그렇다. 서로 통할 때 비로소 평화가 온다. 그러니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의 뜻은 무엇일까. ‘통하는 사람들’이다. 무엇과 통하는 걸까. 신의 속성과 통하는 거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평화가 이루어진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라는 예수의 말도 그렇다. 거기에는 차단벽이 없다. 하나의 속성이 안팎으로 터져 있다. 서로가 서로를 공유한다. 인간이 신을, 신이 인간을 공유한다. 그래서 예수는 신을 품은 인간이자, 인간을 품은 신이다.

예수가 하늘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일러준 장소를 기념해 세워진 갈릴리 호수 근처의 팔복 교회.

예수가 하늘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일러준 장소를 기념해 세워진 갈릴리 호수 근처의 팔복 교회.

산상수훈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 10절)

이 구절에서 많은 사람이 순교를 떠올린다. 그런데 진정한 순교란 뭘까. 이교도의 땅에서 선교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일까. 그것만이 ‘의로움 때문에 당하는 박해’일까. 예수의 메시지는 그보다 더 깊은 곳을 찌른다. 예수는 신의 속성을 공유할 때, 그렇게 평화를 이룰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메타노이아(마음의 눈을 돌려라)!”라고 외쳤다. 나의 눈을 예수의 눈으로, 나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돌리라는 뜻이다.

그렇게 눈을 돌리는 과정에서 고통이 생긴다. 나의 눈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고집, 나의 집착, 나의 욕망이 무너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이 바로 ‘박해’다. 때로는 나의 안에서, 때로는 나의 밖에서 밀려온다. 그런 박해를 통해 우리는 의로움을 찾아간다.

히브리어로 ‘의로움’은 ‘체다카(Tzedakah)’이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라는 뜻이다. 그럼 무엇에 부합하는 걸까. 그렇다. ‘신의 속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게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렇게 나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게 ‘체다카’이다. 진리를 찾는 인간에게 그보다 더 의로운 일이 있을까.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갈릴리 일대에서 만난 옛 그림. 예수 당시 갈릴리 지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갈릴리 일대에서 만난 옛 그림. 예수 당시 갈릴리 지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팔복교회에서 나오자 멀리 갈릴리 호수 위로 노을이 떨어졌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새겨놓은 팻말 위에 돌멩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는 유대인의 묘역이 있다. 돌로 된 관마다 돌멩이들이 놓여 있었다. 유대인들은 묘지를 찾을 때 꽃 대신 돌을 올려놓는다. 팔복의 일곱 번째 메시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 팻말 위에도 누군가 돌멩이를 놓아두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어떤 기도를 했을까. 자신의 삶에서 어떤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도를 했을까.

나도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 팻말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물음이 올라온다. 예수가 묻는다.

“네가 찾는 삶의 평화는 무엇인가? 너는 어떤 평화를 바라는가?

〈28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2000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징표를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을 보게 해달라.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 알려 달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징표를 요구했습니다.
그게 있어야만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려 했습니다.

거기에는 큰 착각이 깔려 있습니다.
‘하느님=눈에 보이는 분’ ‘하느님=손에 잡히는 분’이라는
도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다” “내 손으로 직접 만져야 믿겠다”는 생각을
사실 우리도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유대인과 똑같이 말입니다.

고(故) 차동엽 신부와 인터뷰를 할 때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차 신부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며
  ‘하느님은 이런 존재‘라고 못박는 건 곤란하다.”

그건 우리의 기준, 우리의 안목으로
하느님을 평가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점 안으로
하느님을 구겨 넣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말 끝에 차 신부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건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이고 편협한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다.”

무한한 하느님을
인간의 유한한 생각 속에 가두는 일.
어쩌면 지금도 우리가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신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생각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한의 신을
유한의 인간이
가두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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