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30일(현지시간) 프랑스 명품 브랜드 발망(Balmain) 패션쇼 무대에 깜짝 게스트가 등장했습니다. 프랑스의 전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였죠. 무심한듯 시크한 표정으로 금빛 원피스를 입고 캣워크를 누비는 그를 보며 ‘카를라 언니 믓찌다(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1967년생으로 54세인 브루니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에겐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유명하지만, 패션모델이자 가수이기도 하죠. 하지만 발망의 런웨이에서 브루니는 그저, 브루니 자신으로 빛났습니다. 타인과의 혼인신고, 또는 누군가의 엄마라는 혈육으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닌, 카를라 브루니 그 자신으로요.
한국에도 ‘믓찐’ 언니들은 차고 넘치죠. ‘믓찌다’는 말을 유행시킨 엠넷 예능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의 아티스트 모니카의 말도 화제입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그는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1초도 뜸들이지 않고 “자가(自家)ㆍ자차(自車)ㆍ자아(自我) 없는 남자”라고 답했죠. 이미 모든 걸 이룬 남자보단 같이 이뤄가는 관계를 원한다는 이 말에 대한민국 많은 여성이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을 보면 열광보다는 어리둥절함이 앞섭니다. 대한민국 여성의 얼굴 격인 퍼스트레이디가 될 가능성이 큰 인물을 놓고 들려오는 말은 그다지 ‘믓찌지’ 못하니까요. 무슨 벽화부터, 범죄 혐의, 스토킹, 앰뷸런스 등은 물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안와골절’이라는 용어까지, 사실여부를 떠나, 세간에 나돌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8일 페이스북에 올린 말에, 더이상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감합니다. “영부인도 국격을 대변합니다”라는 말이죠. 거대여당의 대통령 후보의 수행실장인만큼 한 의원의 말엔 무게가 실립니다. 그런데, 한 의원은 같은 글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배우자를 비교하는 문구를 썼다가 수정했습니다. 원래는 “두 아이의 엄마 김혜경 vs 토리 엄마 김건희”라고 대조시켰던 것을 “김혜경 vs 김건희”라고 수정한 겁니다. 두 아이의 엄마인 것은 국격에 맞는 일이고, 반려견인 토리의 엄마일뿐인 것은 국격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해석이 되면서 논란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두 퍼스트레이디 후보 역시 한 의원이 붙인 수식어로만 정체성이 수렴할 분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퍼스트레이디는 누군가의 엄마로서만 정의되어야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고요. 이런 사고방식은 현재 0.8이며 앞으로도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을 높이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1세기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퍼스트레이디의 역할도 변하고 있죠. 미국의 현 퍼스트레이디인 질 바이든 여사는 지금도 교단에 서는 현직 교수입니다. 질 바이든 여사를 두고 “애슐리의 엄마”이기에 미국의 국격에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가 과문한 탓일지 몰라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젠 퍼스트레이디뿐 아니라 퍼스트 젠틀맨도 많이 나오는 시대이고 하고요. 물론, 대한민국 밖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아직도 대통령의 배우자라고 하면 영부인(令夫人)만 떠올리고 영부인(令婦人)은 떠올리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현재 청와대에서 행복한 견생(犬生)을 영위 중인 반려견도 이름이 ‘토리’ 아니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