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비단주머니 퍼포먼스…그 씁쓸함에 대하여

중앙선데이

입력 2021.11.20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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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호 31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죽은 제갈량이 21세기 대한민국 대선판에 ‘비단 주머니’로 돌아왔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윤석열 대선후보에게 비단 주머니를 건네고, 대선후보는 이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퍼포먼스는 대중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한 이벤트로 보인다. 그런데 비단 주머니가 일회성 퍼포먼스로 끝난 게 아니라 이후 여러 담론으로 확산하고, 비단 주머니를 들먹이며 쏟아지는 선거 전략을 보는 건 씁쓸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비단 주머니’의 진정한 의미를 몰라서 그런다면 해프닝이겠지만, 알고도 저런다면 과연 그들에게 나랏일을 맡겨도 되는지 의구심이 생겨서다.

금낭묘계(錦囊妙計). 이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비단 주머니 속의 신묘한 계략의 장면으로 일반에 각인시킨 건 나관중 『삼국지연의』에 그려진 제갈량의 금낭계다. 유비가 손권의 누이와 결혼하러 강동으로 갈 때 조자룡에게 건넨 세 개의 금낭 이야기는 워낙 알려진 터라 줄거리 묘사는 필요 없을 거다. 다만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상대의 계략에 계략으로 맞서는 ‘전술’(戰術)이었다. 첫째 금낭은 여론전이고, 둘째 금낭은 속임수이며, 셋째 금낭은 사람을 도구로 활용할 것, 즉 유비의 아내가 된 손권의 동생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비단주머니 본질적 의미는 기만술
전시에도 최후순간 꺼내 쓰는 전술
국민의 민생이 걸린 중대사 대선은
단순히 승부 가리는 게임이 아니다

『삼국지연의』에는 제갈량의 금낭이 여러 차례 나온다. 제갈량이 3차 북벌에서 퇴각할 때 강유에게 남긴 금낭의 전술은 역시 속임수인 ‘위위구조’(圍魏救趙)였고, 오장원에서 죽기 전에 남긴 금낭의 메시지는 ‘배신’이었다. 조조가 ‘합비대전’ 당시 장료에게 목갑에 담아 보낸 ‘목갑계’도 금낭계와 같은 맥락이다. 제갈량만의 특허품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금낭계는 중국 문학과 대중문화에서 즐겨 활용하는 코드이기도 하다.

한데 금낭계의 장면엔 빠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금낭은 도저히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최후의 순간에 열어보라’는 것이다. 금낭에 쌓인 계책이란 그 기본이 사람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기만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낭계는 전쟁 중, 혹은 전시에 준하는 위기 시에만 활용하는 계책이고, 생사의 기로에만 열어보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선데이칼럼 11/20

선데이칼럼 11/20

금낭계의 원류를 따라가자면 태공망의 병법서 『육도』(六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감출 도(韜)는 고대 시기에 활집이나 칼을 넣는 주머니에서 유래한 말이다. 적을 상대하는 계책을 담은 책. 칼과 활을 아무 때나 휘둘러선 안 되듯 계략이란 숨겨두고 무기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만 꺼내 쓴다는 뜻이다. 또 병법의 대목은 적을 향한 것이지, 내부를 향해 활용해선 안 된다. 조직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순간 조직의 신뢰가 무너지고 서로 의심하며 심성이 삭막해지기 때문이다. 병법 지식은 감춰두는 것이지 꺼내 들고 전시하는 게 아니다. 병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기본 상식이다.

처음에 이 대표가 ‘비단 주머니’ 운운했을 때만 해도 ‘무협을 애호하는 젊은이인가 보다’며 넘겼다. 상대에 타격을 주고 내가 이익을 보는 모계(謀計), 즉 모략의 언어를 민주주의 정치를 하자며 진지하게 말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비단 주머니 퍼포먼스’까지 보게 되는 날이 왔다. 참으로 아연하고 착잡하다.

그대들은 대선을 승부를 가려야 할 게임 혹은 전투로만 보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지금 공개된 비단 주머니 1호는 여론전에 관한 것이고, 이 대표가 윤 대선후보에게 건넨 비단 주머니 내용은 유세차 앱이니 웹드라마니 전우치 전략이니 하는 것들이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대선에서 승리한 후 만들고 싶은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이 와중에 정치 행보 말고 어쩌다 흘러나오는 정책 방향은 당황스럽다. 최근 윤 후보의 종부세 재검토 발언을 보며, 개인적으론 고마우나 과연 그가 시대의 흐름을 읽고는 있는지, 그것이 국민의힘의 정책적 방향인지 궁금해졌다. 부동산값 폭등과는 별개로 부동산으로 야기된 불평등과 불로소득의 견제는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한데 그런 강력한 장치 중 하나인 종부세를 폐지한 후 이런 국가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대안 제시도 없다.

국민에게 대선은 민생이 걸린 중대한 국가 대사다. 누가 되느냐가 중요한 건 우리가 앞으로 살게 될 나라가 어떤 나라일지가 중요해서다. 국민이 살고 싶은 나라는, 나라 걱정 안 하고 생업에 집중하며 편안하게 사는 나라다. 집값 안정, 물가 안정, 튼튼한 국방, 일자리 확보도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불평등과 불공정 해소에 정치인들이 애쓰고, 우리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건 더 중요하다.

한데 지금 우리는 정치인들 때문에 더 정신 사납고, 누가 더 거짓말을 하는지 가려내야 하는 일로 난감하다. 대선이 승부를 가리는 게임은 맞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향후 국가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비전을 보여주고, 설득하고, 실력을 보여주는 정공법을 놔두고, 웬 ‘금낭계’ 같은 술수에 이렇게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한가. 한비자는 “지교(智巧)를 백성이 쓰면 제 몸이 상하고, 왕이 쓰면 나라가 망한다”며 일을 하는 데 지나치게 머리 굴리는 걸 경계했다. 국민이 대선전에서 보고 싶은 건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비전과 실력, 그리고 진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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