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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맞아죽을 각오로 쓴 책 친일 선언, 김어준도 추천사 썼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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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38〉16년 전 친일 논란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 회는 재미없을 것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번에는 나의 일본 관련 사건에 대한 해명과 변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 잊혀진 얘기지만 나한텐 딱 한 번이라도 해명을 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2005년 나는 일본 산케이신문에 난 몇 줄의 기사로 2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난 단 한 번 어떤 매체를 통해 해명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난 2년간 죽어서 살았다. 일종의 자중의 시간을 보낸 거다.

중앙SUNDAY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좋아서 쓸 수 있는 얘기가 60%, 쓸 수 없는 얘기가 40% 될 것이라고 실토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무슨 술수 따위를 벌이는 게 아니다. 이 문제는 인생 막바지에 누구나 어떻게 살아왔는가 자전적 얘기를 쓰게 될 경우 모든 주인공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씁쓸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한테나 쓰고 싶은 스토리가 있고 또 반대로 남에게 숨기고 싶은 얘기나 감추고 싶은 얘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이없게도 중앙 편집진이 나에게 치명적으로 느껴지는 그래서 숨기고 싶어했던 일본 필화(?) 사건에 관해 슬쩍 꺼내든 것이다. 그러니까 써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본 관련 얘기를 써보라는 것이다. 해명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자! 지금 내 입장에서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상대는 중앙SUNDAY 편집진이 아니라 중앙SUNDAY를 읽어주시는 애독자님들이시다. 오죽했으면 내가 독자님들을 제왕 급인 전하로 치켜올렸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전하께 이런 발칙한 소견을 상소해보는 것이다.

“도쿄 와보니 일본은 없는 게 아니라 있더라”

2005년 조영남 친일 논란은 일본 우익 성향 매체와의 인터뷰 발언이 와전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졌다. 조영남씨의 산케이신문 인터뷰를 통역했던 오시오 게이코(사진 왼쪽·한국명 임혜자. 어머니가 일본인)의 훗날 해명에 따르면 조씨는 독도·교과서 문제에 대처하는 교활함의 측면에서 일본이 한 수 위라고 발언했으나 산케이가 그런 맥락을 삭제하고 기사를 내보냈다. 산케이의 기사 제목은 ‘한·일 우호에 역할했으면’이었으나 이를 국내 연합뉴스가 보도하면서 ‘조영남, “냉정 대처 일본이 한 수 위”’라는 제목을 달았다. 조씨에 따르면 오시오 게이코는 “조영남씨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 조영남]

2005년 조영남 친일 논란은 일본 우익 성향 매체와의 인터뷰 발언이 와전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졌다. 조영남씨의 산케이신문 인터뷰를 통역했던 오시오 게이코(사진 왼쪽·한국명 임혜자. 어머니가 일본인)의 훗날 해명에 따르면 조씨는 독도·교과서 문제에 대처하는 교활함의 측면에서 일본이 한 수 위라고 발언했으나 산케이가 그런 맥락을 삭제하고 기사를 내보냈다. 산케이의 기사 제목은 ‘한·일 우호에 역할했으면’이었으나 이를 국내 연합뉴스가 보도하면서 ‘조영남, “냉정 대처 일본이 한 수 위”’라는 제목을 달았다. 조씨에 따르면 오시오 게이코는 “조영남씨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 조영남]

“전하 소인에겐 숨겨두고 싶었던 얘기가 있사옵니다. 소인에게 성삼문 이상의 불고문이나 유배 혹은 참수 명령을 내리신다 해도 소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겠나이다.” 하! 그런데 뜻밖에도, 어이없게도 전하께선 돌연 “짐이 약속을 하겠소!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조 장군의 일본 관련 얘기를 슬쩍 들려주지 않겠소?”, 이렇게 된 형국이다. 그러니까 명심하시라! 지금부터 나는 중앙 편집진이 아니라 나는 전하의 명으로 해명에 나설 것이다. 행여 무슨 잘못이 발생하더라도 전하 역할을 맡은 중앙 독자님들께 돌아가는 것이다. 도장 팍팍. 복사 찍찍.

그때까지 나는 선량한 소시민이었다. 안락한 연예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깡 시골서 올라와 대학을 들어가고 아르바이트로 미8군 가수가 되어 ‘딜라일라’라는 외국 번안 가요를 불러 인기 가수가 되고 ‘와우아파트 우르르르’ 무너졌다는 풍자 노래를 불러 군대에 끌려가(자원입대가 아니라는 뜻) 용산 육군본부에서 3년4개월 근무, 제대 후 곧장 도미했다가 10여 년 만에 다시 돌아와 착실하게 연예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썩 잘나가는 가수 생활 중이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다 예측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어느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당시 중앙일보 조우석 기자의 전화를 받고 접선한다. 용건이 거창했다. 2005년,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이다. 그러니까 2005년이 일본이 우리 조선을 찬탈한 지 딱 100년, 해방된 지 딱 60년, 한일 수교 딱 4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 나는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는 수치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제대로 된 신문사라면 당연히 무슨 특집기사라도 내보내야 하는데 정작 쓸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글을 쓸만한 사람들이 유독 일본에 관해서는 꽁무니를 뺀다는 것이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뻔하잖는가. 나더러 쓰라는 수작(?)인 것이다.

이럴 때 난 당연히 노코멘트를 선언했어야 한다.

“야! 조우석. 그렇게 중차대한 문제를 어찌 나 같은 가수 나부랭이에 떠맡기냐. 난 그렇게 못해.”

이런 반응을 보였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못 말리는 오지랖, 입방정이 “그래, 그것참 딱하군. 알았어. 그럼 내가 해보지 뭐”, 이렇게 된 거다. 나는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고 100년간 변한 일본에 관해 써서 한국으로 보냈고 중앙일보에선 특집으로 대문짝만하게 지면을 할애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대강 이런 거였다.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1997년)라는 책을 냈는데 일본에 와 도쿄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다봤더니 일본은 없는 게 아니라 있더라(그후 전여옥과 나는 절친 사이로 현재에 이르렀다. 이름이 아름다운 여옥씨! 연락 좀 하고 삽시다).

이어령 교수께선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년)이란 명저를 내셨는데 일본에 와보니 축소지향에 버금가는 확대지향도 있더라(당시 최대의 군함을 제조한 것. 진주만 공격 따위). 뭐 대충 내 방식으로 써서 보냈는데 한국에선 열광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영남씨의 2005년 책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 신문 광고.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의 2005년 책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 신문 광고. [사진 조영남]

자! 그럼 나는 왜 그 일을 자청했는가. 뒤늦은 변명을 늘어놓겠다. 나는 세상이 다 아는 가수다. 연예인이다. 다시 말해 정통 광대다. 광대가 뭐냐. 심플하다. 이 풍진 세상살이에 찌들어가는 하루살이에 틈틈이 웃음을 전해주는 전문 배달꾼이다. 그게 광대다. 역사적으로 봐도 광대는 늘 있었다. 궁중에도 있었고 마을에도 있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담아 올려놓고 무덤을 향하는 상여꾼 맨 앞자리에 종을 치며 “아이고 북망산이 어디메냐. 이제 가면 언제 오냐” 선창을 하는 게 대표 광대다. 삶과 죽음 사이의 미묘한 어색함을 메꿔주는 역할 전문가가 바로 광대다. 세상 어떤 곳에도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뱉어놓은 침 만큼이나 더럽고 치사한 갈등을 해결해주는 게 광대의 역할이다. 그런데 무슨 조화 때문인지 광대는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어 왔다(요즘은 달라졌다. BTS나 ‘오징어 게임’ 같은 건 최상이지만). 광대라는 어휘 자체가 늘 찝찝했다. 그런 판에 나 조영남은 광대지만 본적이 황해도다. 김구·이승만·안중근을 배출한 동네 출신이다. 게다가 나는 공부깨나 한 광대다. 미국에서 기독교적 사랑에 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광대다. 그래서 중앙일보가 조영남을 일본으로 급파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의 갈등 관계는 그저 그런 관계였다가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급격하게 최악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본 문제는 누구나가 꺼리는 금기사항으로 묶여졌다. 그때는 지금처럼 소녀상 작품도 없던 때다.

이런 상태에서 광대 한 명이 마치 패튼 장군이나 된 것처럼 온갖 폼을 잡고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섰던 것이다.

나는 개선장군처럼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내가 보낸 글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당장 책으로 묶어내자는 의견이 나왔고 일본에 관한 내 개인 생각들을 보태서 분량을 늘려서 책 한 권 분량으로 만드는 일이 진행된다. 이젠 책 제목만 남았다. 중앙일보 근처에 있던 한 식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노래와 마찬가지로 책은 제목이 큰 역할을 하는 법이다. 나를 위해 조우석을 비롯 열 명 가까이나 둘러앉았던 것 같다. 나는 이럴 때 매우 민주적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할 줄 안다는 얘기다. 제목을 좁혀갔다. 마침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일본인이 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1999년)이라는 책의 패러디 형식으로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이 최종 제목으로 채택된다. 박수 짝짝짝. 복사 찍찍!

아!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땐 무슨 깡으로 그런 제목을 썼는지 나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때는 최고의 제목이라 생각했다. 나는 미국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물론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이웃을 사랑하라, 특히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귀가 아플 만큼 들어왔다.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책 제목에 들어간 친일이라는 의미는 매국이나 매국노가 아니라 ‘일본과 친하다’라는 국어 되살리기 사랑이 제일 컸고, 내가 배웠던 기독교적 이웃사랑의 뜻을 실천하는 단순한 뜻의 결과물이었다.

책 제목 친일, 매국 아닌 ‘일본과 친하다’ 뜻

책의 추천의 글을 써주신 분들의 면면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미남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셨던 고 정운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셨던 정치인 정동영. 유명 카피라이터 겸 행복전도사 고 최윤희. 그뿐 아니다. 현재 라디오 스타로 영향력 왕창 불어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김 총수는 추천의 말 끝부분을 이렇게 장식했다.

“스스로를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기 객관화 능력, 거기에 지성을 더하면 한량이 된다. 조영남은 우리 대중문화가 보유한 최고 수준의 한량이다. 그런 그가 일본을 만났다. 무심한 객관화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일본이 다뤄질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알량한 폄훼나 열등의 호들갑 없이 일본이 그에게 뚜벅뚜벅 읽혀 들어가는 풍광을 목격하는 건 통쾌하기까지 하다. 멋지다 조영남!”

책은 즉시 일본어로 번역되어 책을 낸 출판사(고단샤)에서 선전용 인터뷰를 부탁해 또 일본으로 건너간다. 주위에서 부디 산케이만은 물리쳐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일본을 정복(?)하러 온 내가 뭐 무서울 게 있으랴. 산케이건 강케이건 올 테면 오라 해서 거기 실린 기사의 불과 몇 줄(말도 안 되는, 교과서 및 독도 문제에 냉정히 대처하는 일본이 한 수 위라는 대목. 또 야스쿠니 방문과 독도 문제) 때문에 나는 한국에 돌아오는 즉시 날아드는 돌팔매 장돌 벽돌 연탄재에 맞아 즉사하고 만다. 2년간이나 죽었다 간신히 살아났다. 빌어먹을 양국의 갈등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 가슴 속 깊은 곳엔 갈등은 사랑만이 약이라는 레시피가 자리 잡고 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왜 행복하게 살았는 줄 아는가? 고부갈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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