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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 탓 ‘척키 인형’처럼 살아, 이제 인생을 즐기려고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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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호 19면

에세이 낸 ‘컬투’ 김태균

21년 차 개그맨이자 SBS 라디오 ‘두시탈출 컬투쇼’를 16년간 이끌어온 DJ 김태균씨가 최근 『이제 그냥 즐기려고요』(몽스북)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표지에는 ‘강박 탈출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자타공인 ‘가장 시끌벅적하고 가장 웃긴’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늘 밝고 유쾌했던 그의 이면에 도대체 어떤 강박이 숨어 있었던 걸까.

“개그맨이지만 남들 같은 개인기도 없고, 외모도 다른 사람을 웃길 정도는 아니고. 뭐 하나 특출난 게 없다는 강박 때문에 오랫동안 ‘척키 인형’으로 살았어요. 쓸데없는 자격지심에 남에게 꿀리기 싫어서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싫어도 좋은 척 살았던 거죠.”

콤플렉스, 나이 50에 처음 툭 털어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커버를 씌운 쿠션을 감싸 안은 김태균씨.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함께 한 소풍에서 찍었다.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하려는 막내아들의 맘을 아셨는지 어머니는 이날 유난히 크게 활짝 웃으셨다. 신인섭 기자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커버를 씌운 쿠션을 감싸 안은 김태균씨.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함께 한 소풍에서 찍었다.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하려는 막내아들의 맘을 아셨는지 어머니는 이날 유난히 크게 활짝 웃으셨다. 신인섭 기자

그는 책 도입부에서 왜 그렇게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게 됐는지 남들은 모르는 콤플렉스 스토리를 하나씩 털어놓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목욕탕에서 아빠와 바나나우유 먹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는 꼬마 김태균. 갑자기 기운 집안 형편 때문에 어머니·형·누나들과 함께 1년 넘게 여관을 전전하던 시절에는 활짝 핀 꽃에도 괜히 화가 났다고 했다. 한밤중에 자전거를 훔쳤다가 다음 날 아침 양심의 가책을 느껴 아무도 몰래 있던 곳에 돌려놓았던 ‘자전거 도둑’ 사건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대학가요제·탤런트 시험에서 떨어지고 목표도 아니었던 개그맨 시험에 덜컥 붙어버린 후 ‘참 자기’와 ‘거짓 자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고 고백한다.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착하다’였는데, 성인이 되고부터는 그 소리가 미치게 싫었어요. 나는 내가 착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거든요. 냉정할 때는 엄청 냉정하고, 사람 끊어낼 땐 미련 없이 확 돌아서는 못된 면이 많은데 남들은 왜 나를 착하다고 할까? 그건 내게 별 매력이 없다는 말이구나. 자존감이 계속 낮아졌죠.”

버릴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착한 남자 콤플렉스’는 아내를 만나면서 비로소 해결됐다고 한다. 연애 시절 “넌 내가 왜 좋아?” 물었을 때 아내는 “오빠는 착해서 좋아”라고 답했단다.

“별 매력이 없어서 착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 없는 남자와 평생을 같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여자는 없겠죠. 그때서야 남들이 내게 하는 ‘착하다’는 말을 의심 없이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못돼 처먹었다’는 소리를 듣는 거보다는 낫다고.”(웃음)

이처럼 언제고 한 번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대화를 나누며 아픔·실수·후회를 털어버리고 서로를 위로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올해 나이 50. ‘쉰 살의 나에게 주는 선물’로 글쓰기에 도전했다.

“16년 동안 남의 사연 읽는 데는 익숙했지만 내 이야기를 쓰려니까 정말 막막하더군요. 남에게 이런 얘기까지 굳이 알려야 하나 망설임도 많았죠. 그러다 문득 얘기 못 할 이유가 없구나, 내 고백은 내게만 부끄러운 일이지 남들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일이겠구나 깨달았죠. 이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툭툭 꺼냈더니 후련해지면서 오히려 글 쓰는 게 신이 나더라고요.”

‘강박 탈출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태균씨의 책 『이제 그냥 즐기려고요』 표지.

‘강박 탈출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태균씨의 책 『이제 그냥 즐기려고요』 표지.

책 제목 ‘이제 그냥 즐기려고요’는 그의 인스타그램 글에서 찾은 문장이다.

“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되는 건데 과거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고민만 하며 보내기엔 시간이 아깝잖아요. 하루하루가 내 인생의 생방송이고, 내가 주인공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인스타그램에 몇 줄 적은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16년간 DJ를 해야 한다고 계약서에 쓰여 있었다면 사인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저 하루하루를 즐겼더니 벌써 16년이 됐다고. 여러분도 하루하루를 즐겨라, 나도 이제 즐기겠다, 뭐 이런 내용을 적은 건데 출판사 대표가 그걸 콕 집어내더라고요.”(웃음)

‘강박 탈출 에세이’라는 부제는 진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코믹하다. 김씨의 글이 그렇다. 전반부에서 힘겹게 과거의 강박과 콤플렉스를 털어놓은 그는 책 후반부로 가면서 독자들을 쥐락펴락 울리고 웃긴다. 16년간 읽어온 라디오 사연 중 그가 기억하는 가장 웃기고, 의미 있고, 떨리는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세상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한강으로 가던 중 택시 안에서 ‘두시탈출 컬투쇼’ 사연들을 듣고 킬킬거리다 어느새 삶의 희망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 DJ가 잊지 못할 만큼 웃긴 사연들은 오죽할까(라디오를 한 번이라도 듣고 읽으면 그의 말투까지 전해져 내용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반면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적은 글들은 읽는 동안 내내 코끝이 찡해진다.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사실은 어머니 때문이에요.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태균아, 인생은 허무하도록 짧단다. 나중은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네가 좋아하는 거, 네가 뭘 하면 행복한지를 찾아 즐기면서 살아’라고 하셨거든요. 남이 바라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에 집중하자 결심한 계기죠.”

유난히 어머니와의 살갑고 짠한 추억이 많았던 막내아들은 평소 서로 메모도 많이 주고받았단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다음 날 아침 밥상에는 ‘밥 꼭 챙겨 먹어’‘설거지는 하지 말고 물에 담가만 놔’ 등등의 메모가 늘 붙어 있었어요. 그럼 저도 ‘사랑해요, 어머니’ 등등의 답장을 붙여놓죠. 어머니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하면서 서랍장을 열었는데 나랑 주고받은 메모가 한가득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더 늦기 전 나를 들여다본 건 잘한 일

서울 상암동 작업실에는 ‘컬투’ 공연 때 썼던 소품과 장비들이 가득하다. 신인섭 기자

서울 상암동 작업실에는 ‘컬투’ 공연 때 썼던 소품과 장비들이 가득하다. 신인섭 기자

책에는 ‘엄마 생각’이라는 소제목으로 다섯 페이지에 걸쳐 단어들만 나열한 부분이 있다. ‘흰머리 파마 고운 할머니’ ‘보라색’으로 시작해 ‘내 발등’ ‘내 발톱’ ‘내 얼굴’로 끝나는 단어들은 100여 개에 이른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단어들을 죽 쓴 건데 하나마다 추억이 다 있어요. 그것만 갖고도 책 하나 쓸 수 있을 만큼. 그걸 쓰면서 참 행복했고, 그래서 더욱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엄마와 관련된 기억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카피라이터이자 작가인 편성준씨는 『이제 그냥 즐기려고요』를 읽고 “글쓰기 교본 같은 책”이라며 “쉽게 읽히는 책인데 여러 군데 밑줄을 치고 귀퉁이를 접었다”고 했다.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김태균씨의 책은 중년에 접어든 이들이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 책장 맨 앞에 쓰인 ‘더 늦기 전에 이쯤에서, 나를 들여다본 일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문장 때문이다.

“얼마 전 배우 강부자 선생님이 라디오에 출연하셨는데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시냐’ 여쭸더니 ‘50~60대로 가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아이들 키우고 집 장만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50~60대는 바바리에 스카프도 멋지게 하고 낙엽 진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까. 기력도 지금보다 나았고’라는 게 이유였어요. 제 나이 딱 쉰 살.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징그럽고 까마득하지만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바심이나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이젠 없어요. 강부자 선생님이 돌아가고 싶다는 그 나이의 출발선에 있으니까요. 인생을 이제 그냥 즐기려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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