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방 없어요" 백설공주 아가씨는 냉정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19 17:00

업데이트 2021.11.23 17:15

[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16화

동키호택이 걸어온 길.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동키호택이 걸어온 길.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베르시아노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오늘 목표는 기껏 8km 떨어진 작은 마을 부르고(Brugo)다. 까미노에서 하루에 8km는 시쳇말로 껌이지만 아직 발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하루에 25km 이상을 걷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병든 거북이다. 발목에 약간의 무리가 왔지만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길가에 호택이를 유혹하는 풀들이 길에 즐비했으나 어찌나 빨리 걸었는지 오전에 도착했다.
갑자기 욕심이 났다. 12km만 더 가면 렐리에고스(Reliegos)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동네 알베르게 세 곳이 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걸으면 3시간이면 가는데 한번 도전해볼까? 마음이 팥죽 끓듯 분주해졌다.
‘그래 가보지 뭘. 천천히 걸어도 4시면 들어가잖아?’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먹을 복 타고난 호택이. 걷다 보면 끊임없이 뭔가를 얻는다.

먹을 복 타고난 호택이. 걷다 보면 끊임없이 뭔가를 얻는다.

렐리에고스까지는 마을이 없다. 그냥 주욱 가야한다. 12km 중 7km 정도를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마을을 2km 정도 남겨놓고는 주저앉고 싶었다. 한쪽이 불편하니 성한 발도 무리가 갔다. 100미터를 걷는 데에도 진땀이 났다. 길가에 널린 풀 덕에 호택이 걸음이 느려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겨우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한 남자가 ‘부엔 까미노’로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절뚝거리는 나를 보더니 고맙게도 알베르게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앞장서 한참을 가던 그가 멈췄다.
“아이고 제가 잘못 왔네요. 동네 맞은편입니다. 죄송합니다.”
거의 200여 미터를 되돌아 가야한다고 했다.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택이가 간식을 먹는 덕분에 걷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호택이가 간식을 먹는 덕분에 걷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내가 예정한 알베르게에 데려다 준 사내는 다시 부엔 까미노를 외치더니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벨을 누르니 황소만 한 개와 백설공주처럼 가냘픈 아가씨가 나왔다. 호택이를 보더니 아가씨가 ‘부로’를 외치고 개는 꼬리를 사타구니에 숨겼다.
“하루 묵어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희는 문 닫았어요.”
“그러면 이 동네 어느 알베르게가 문을 열었을까요?”
“여기는 다 닫았고 6km 더 가면 두 군데가 문을 열었어요.”
조금 남은 기운마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제가 물은 좀 드릴게요.”
아가씨는 호택이 주라며 양동이에 물을 길어왔다. 호택이가 물을 마시지 않아 내가 마셔버렸다. 놀라서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가씨가 웃었다. 그러더니 재워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별 도리가 없었다.
“호택아,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가자. 레츠 고우~”

터벅터벅, 터덜터덜. 숙소 찾아 삼만리.

터벅터벅, 터덜터덜. 숙소 찾아 삼만리.

호택아 저기 저 산 좀 봐.

호택아 저기 저 산 좀 봐.

전화로 가이아 알베르게라는 곳에 전화를 하니 방이 있단다. 6km를 걷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저녁 7시가 돼서야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림?”
웬 아주머니가 나와 당나귀를 보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예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가이아 알베르게에 예약하셨죠?”
가이아 주인 루이사였다.
“당나귀가 있네요. 왜 말을 안했어요?”
그녀는 호택이를 보더니 서툰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화를 내듯 말했다. 이어 남편까지 데리고 나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는 뭔가 심각하게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쫓겨나면 어쩌지? 오늘 밤에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조금 뒤 남편 카를로스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내는 당나귀가 있는 것을 몰랐대요. 미리 말씀을 좀 하시지요.”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 마을에 큰 풀밭 공터가 있어요. 풀도 많고 물도 있어요. 당나귀가 머물기 아주 좋은 곳이랍니다. 지금 그곳 관리사무실 직원들이 퇴근을 했어요. 미리 알았으면 열쇠를 받아놓을 수 있었다고 아내가 아쉬워합니다.”

그러고 보니 루이사는 호택이 걱정을 한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당나귀에 대한 정서가 이 정도라니 고맙고 미안했다.
뜻하지 않게 하루에 26km를 걸었다. 까미노 이후 아니 내 평생 이렇게 많은 거리를 하루에 걸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것도 다리를 끌면서 말이다.
“루이사. 내일 하루 더 묵어도 될까요? 다리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럼 잘 됐어요. 내일 아침에 당나귀를 그 공터로 옮기세요.”
루이사는 온통 호택이 생각만 하고 있었나 보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 카를로스와 나는 호택이를 데리고 공터로 갔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 있고 풀이 무성해 호택이가 놀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뒹굴기 좋은 마른 땅도 있었다. 호택이의 목줄은 물론 얼굴을 감싸고 있는 가죽 끈을 모두 풀어주었다. 내 마음도 후련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얼음이 얼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니 얼음이 얼었어요.

호택이 데리고 동네 공터 풀밭에 가는데 똥개가 왈왈왈왈. 호택이가 슥 쳐다보니 바로 깨갱.

호택이 데리고 동네 공터 풀밭에 가는데 똥개가 왈왈왈왈. 호택이가 슥 쳐다보니 바로 깨갱.

햇살이 퍼지며 서리가 녹기 시작했다.

햇살이 퍼지며 서리가 녹기 시작했다.

호택이 몸에 있던 줄을 모두 풀어주었다. 오늘은 맘껏 놀아라.

호택이 몸에 있던 줄을 모두 풀어주었다. 오늘은 맘껏 놀아라.

알베르게 주인장 카를로스. 알고보니 이 동네 이름이 노새마을이다.

알베르게 주인장 카를로스. 알고보니 이 동네 이름이 노새마을이다.

“택씨, 이 마을의 이름이 뭔지 아세요?”
돌아오는 길에 그가 갑자기 마을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길고 어려워 우물쭈물하자.
“하하하. ‘만시야 데 뮬라스’. 노새 마을입니다. 뮬라스(Mulas)는 노새라는 뜻이라오.”
“아니 왜 이런 이름을 지었죠? 당나귀와 말이 예전에 많았나 봐요.”
 이 마을 바로 앞에 레온이 있다. 과거 레온왕국의 수도였던 도시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말과 당나귀를 끌고 이곳을 오갔단다.
“레온에는 귀족들이 머물고 우리 동네는 그 종들이 말과 당나귀를 데리고 와 머물렀어요. 자연히 말과 당나귀의 로맨스가 있었겠죠. 하하하.”
볼일을 다 본 귀족들이 떠나고 나면 이곳에는 부모 잃은 노새들만 남게 되었단다. 노새는 아빠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이다. 이러다 보니 노새마을이 되었다나.

“그런데 당나귀 크레덴셜에 도장 찍었어요?”
“아니, 당나귀도 크레덴셜이 있어요?”
“그럼요. 당나귀는 까미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이에요. 레온에 가서 꼭 크레덴셜을 받으세요. 마지막 기회입니다.”
내가 발이 아프지 않았다면 전 마을에 숙소가 있었다면 동물 크레덴셜이 있는지도 몰랐을 테다. 운 좋게도 내 동반자 호택이도 순례자증명서를 받았다.
여행에서 벌어지는 일엔 다 이유가 있다.

레온성당 앞에 선 위풍당당 동키호택.

레온성당 앞에 선 위풍당당 동키호택.

하여튼 이놈의 인기하고는.

하여튼 이놈의 인기하고는.

꺄아아~ 부로. 지나가던 수녀님이 인증샷 찍어달라며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냈다.

꺄아아~ 부로. 지나가던 수녀님이 인증샷 찍어달라며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냈다.

호택이도 인증서 받았어요.

호택이도 인증서 받았어요.

장하다 우리 호택이.

장하다 우리 호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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