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기찬의 직격인터뷰

“문 정부 비정규직 제로 약속, 희망 고문만 하다 끝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한국노총은 지난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정책연대를 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의 압승을 도왔다. 때로 날카롭게 각을 세우기도 했지만, 민주당의 든든한 우군으로서의 위상은 유지했다. 이렇던 한국노총이 대선의 길목에서 민주당과 함께 띄운 배의 노 젓기를 멈췄다.

지난달 27일 한국노총은 20대 대선 정책요구안을 냈다. 눈에 띄는 건 곳곳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제로 희망 고문 그만하라. 과도한 가계부채가 양산되고 있다. 소득 불평등은 더 심화하고 있다” 등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최저임금과 성장 연결은 포퓰리즘

민주당과 정책연대 백지상태 검토

청년 사다리 없애 코인·주식 몰려

노조, 산업안전 지킴이로 변신해야

사실 지난해 총선이 끝난 뒤부터 민주당을 대하는 한국노총의 태도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용만 한다” “사탕발림만 있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급기야 지난 9월 한국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선 민주당과의 정책연대 파기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처럼 거리로 뛰쳐나가지는 않았다. 기획재정부나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며 의견을 표출하는 정도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가 전체가 위기 국면에 몰린 상황에서 대규모 집회는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경제사회노동위원회와 정부·정치권, 경영계와 대화로 풀어나가려 애썼다. 말 그대로 정중동(靜中動)이다. 그 중심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현 정부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사실상 민주당과의 정책연대 파기를 선언했다. 정치권에는 실현 가능한 약속(공약)을 하도록 주문했다. 임현동 기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현 정부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사실상 민주당과의 정책연대 파기를 선언했다. 정치권에는 실현 가능한 약속(공약)을 하도록 주문했다. 임현동 기자

그런 그의 행보가 이달 들어 심상찮다. 갑자기 전국 현장 순회에 들어갔다.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조합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했다. 향후 정책연대 방향, 노총의 역점 사업 등을 도출하려 한다. 다분히 내년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 민주당에 등을 돌린 듯하다. 김동명 위원장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를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위원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첫마디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얘기하겠다. 과격한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해달라”며 웃었다.

정책요구안을 보면 문재인 정부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시작은 화려했다. 노동존중사회를 표방했다. 하지만 돌아보라. 이전 정부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지도 않았고, 노동시장은 피폐해졌다. 실패했다.”
실패라고 단정하는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가.
“목표를 높게 잡은 게 패착이다. 대표적인 노동정책으로 표방한 ▶비정규직 제로선언 ▶실노동시간 단축과 좋은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1만원을 되짚어보자. 비정규직 제로선언은 희망 고문만 하다 끝난 꼴이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인천국제공항으로 달려가 덜컥 선언은 했는데, 요구는 빗발치고, 노노갈등만 증폭됐다. 그걸 조정하는 모습이나 능력은 찾을 수 없었다. 슬로건은 좋았으나 한계가 분명했다. 오히려 차별과 격차 해소에 방점을 두고 장기적으로 단계적 접근을 하는 게 맞았다. 실노동시간은 주52시간제 시행 이전보다 기껏 0.008시간(한국노동연구원) 줄었다. 일자리는 고용 쇼크 상황에 내몰렸다. 초단시간 근로자가 급증했다. 최저임금 1만원은 결국 달성도 못 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도 안 올랐다. 오히려 부동산값 폭등으로 주거비용이 늘어나면서 쓸 돈이 없는 지경이 됐다. 소득주도성장이 아니라 불로소득주도성장이라는 비아냥이 나오지 않는가. 취약계층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최저임금을 성장과 연결한 것 자체가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질타에 가까운 평가인데, 한국노총은 대규모 집회도 없었고,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 정부는 운이 좋은 정부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경제여건도 안 보고 선거 때 쉽게 약속했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더라. 비정규직 제로?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한데 비정규직 당사자는 기대했다. 그들을 배신한 셈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한 뒤 김태년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노총과 한 약속을 안 지킬 명분이 없다’고 하더라. 내가 ‘지킬 때가 되면 또 다른 핑계를 대지 않겠는가’라고 되물으니 그냥 웃기만 하더라. 이후에는 본 대로다. 한국노총을 회피하고, 무시했다.”
민주당과의 정책연대 파기를 염두에 둔 것 같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이 너무 크다. 180석이나 몰아줬는데,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졌다. 민주당과의 정책연대를 포함해 과거의 전례나 정치방침에 연연하지 않겠다. 백지상태에서 위원장으로서 조합원의 의견을 물어 조만간 최종 선택하고, 책임을 질 것이다. 한가지는 명확하다. 실현 가능한 약속을 하고, ‘될 사람’이 아니라 ‘함께할 사람’을 택할 것이다. 그것이 양지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이재명·윤석열 후보를 평가한다면.
“극단적 대척점에 있는 듯하면서도 묘한 유사함이 있다. 돌파형이고 강해 보인다. 통 큰 결단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날이 선 칼은 다 위험하다. 개별적인 평가는 이르다.”
사회적 대화가 지지부진하다.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지속가능한 사회로 한 발짝 나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 사회적 대화는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다. 문 정부는 민주노총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결국 안 들어왔다. 성과보다 안타까움이 앞선다. 때로 정치권이 대화와 관계없이 밀어붙이고, 강제로 입법하려는 시도도 했다. 멀쩡한 법률적 기구인 경사노위를 무시하고, 경사노위 밖에서 원포인트 대화(경사노위에 불참 중인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대화)를 하기도 했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묶는다 한들 좋은 결과가 나오겠는가. 경사노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산업 안전이 화두다. 노조는 산재 사고가 터진 뒤에야 보인다는 말이 나온다.
“반성할 일이다. 이젠 노조가 바뀌어야 한다. 사고가 나면 규탄하고 공격하는 이슈 메이커가 아니라 세이프티 디펜서(Safety Defencer)가 돼야 한다. 권리에 걸맞은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고 질 수 있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산업 안전이야말로 노사가 협조할 수 있는 훌륭한 지점이다. 전 사업장에 노조가 참여하는 안전점검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고, 노조별로 예산을 확대 배정토록 할 것이다. 정부와 기업에만 맡기지 않겠다. 직접 발로 뛰겠다. 기업의 꼬투리 잡기가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18일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선 다소 이례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소규모 사업장인 (주)진영프로토사에 한국노총이 감사장을 전달했다. 그것도 중대재해처벌법의 내년 시행을 앞두고 안전 컨설팅을 받은 데 대해서다. 한국노총은 올해 초부터 6개월가량 이 회사의 안전보건 실태를 조사하고, 위험도를 분석하는 한편 개선책을 제시했다. 안전 위험요소를 모두 바꿨다. 덕분에 이 회사는 10월 8일 안전보건경영시스템(ISO 45001) 인증을 받았다. 한국노총은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게 조용히 진행했다.

고용노동부가 이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권기섭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50인 미만 사업장은 산재예방의 사각지대다. 스스로 (예방사업을) 하기도 힘들다. 그런 곳에 한국노총이 안전보건 컨설팅을 한다니 놀랍다. 노동단체가 산재 예방의 주도세력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아주 반갑다”고 말했다.

건설현장 등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물리적 충돌이 잦다.
“원인을 살펴야 한다. 일자리는 한정되고, 그 일자리를 잡지 않으면 삶이 무너지니 극한 대립이 생긴다. 한데 사회적 질서 확립을 위한 체계가 현 정부에 있는지 궁금하다. (건설현장, 화물 수송 등에서) 폭력적 힘의 우위로 일자리를 얻는다면 문제다. 정부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정리해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다. 공권력은 그런 곳에 써야 한다.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부는 대안도 마련해야 한다. 일자리가 엉망이 됐다.”
MZ노조가 많이 생기지만 기존 노동단체에는 가입하지 않겠다고들 한다.
“무엇보다 청년이 올라갈 사다리가 없다. 코인이나 주식이 사다리가 됐다. 이래서야 격차가 줄어들겠는가. 정책 실패가 올라갈 사다리를 걷어내고, 희망을 사라지게 했다. 노조를 포함해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도 잘 안다. 새겨들어야 한다. 조만간 노동시장의 주축이 될 세대다. 생각이 다르다고 따돌리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MZ노조와 기존 노조가 융합하는 방안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