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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 영화 이 장면

왕십리 김종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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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35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최근 조용히 개봉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있다. 김진열 감독의 ‘왕십리 김종분’이다. 왕십리 지역에서 긴 세월 동안 노점을 하며 살아온, 80대의 나이지만 여전히 가게를 지키고 있는 김종분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 다큐엔 반전이 있다. 처음엔 산전수전 겪으며 삶의 신산을 겪은 한 어르신의 질박한 일상을 담은 작품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와 전쟁과 산업화와 독재의 시대를 민초로서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위대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 그런데 툭 던져지듯, 김종분 할머니의 딸 이름이 등장한다. 김귀정. 두루마기를 입은 단아한 흑백 사진 이미지로 각인된, 1991년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세상을 떠난 대학생이다.

왕십리 김종분

왕십리 김종분

이후 ‘왕십리 김종분’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짧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갔던 김귀정의 24년, 그리고 딸을 보낸 후 김종분 할머니가 살았던 30년. 여기서 감독은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이 다큐는 의연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씩씩한 모습을 담아낸다. 시장 사람들과 어울리고 손녀(수영선수 정유인)와 이야기를 나누며, 딸에 대해 말할 때 눈물 흘릴 법도 하지만 담담하게 과거를 전하는 김종분 할머니. 세월은 상처를 치유하는 걸까. 아니다. 딱 한 번, 영화는 김종분 할머니의 눈물을 담아낸다. 딸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노모의 모습. 롱 숏으로 몇 초 안 되는 러닝 타임에 담겼지만 ‘모성의 깊이’를 담은 울림 있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