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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안시영화제 수상 '무녀도' 안재훈 감독 "귀멸의 칼날과 같은 시대 그렸죠"

중앙일보

입력

10일 애니메이션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만난 안재훈 감독이 늘 손에서 떼놓지 않는다는 연필을 들어보였다. 그의 사무실은 그간 작품들의 흔적이 깃든 보물창고 같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0일 애니메이션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만난 안재훈 감독이 늘 손에서 떼놓지 않는다는 연필을 들어보였다. 그의 사무실은 그간 작품들의 흔적이 깃든 보물창고 같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른 나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자기네 사람 이야기, 풍경을 그리는데 우리는 왜 없을까. 제가 창작 애니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질문이죠.”
김동리 동명 단편 소설(1936)을 장편 뮤지컬 애니로 옮긴 ‘무녀도’(24일 개봉)로 지난해 안시국제애니영화제에서콩트르샹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안재훈(52) 감독의 말이다. ‘애니계의 칸’으로 불리는 안시영화제에서 콩트르샹은 가장 독특하고 도전적인 작품에 주는 경쟁부문 상이다.

24일 개봉 토종 뮤지컬 애니 '무녀도' #1920년대 무녀 엄마·기독교 아들 비극 #김동리 동명 소설 화려한 색채로 부활 #'애니계 칸' 佛안시영화제 지난해 수상

미국·일본에 내준 한국 애니 공백 채우고 싶었죠

‘무녀도’는 안 감독이 자신이 이끄는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를 통해 한국 단편 문학을 부활시킨 다섯 번째 작품이자,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단편 애니 ‘메밀꽃 필 무렵’(2012)을 시작으로 ‘운수 좋은 날’ ‘봄.봄’ ‘소나기’ 등을 만들었다. 지난 10일 서울 남산동 제작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단편 문학이 이제 낡은 콘텐트일 수 있는데 해외에서 마침표를 잘 찍었다. 다양한 나라의 애니메이션을 봐온,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도전의 가치를 정돈해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동리의 원작은 1920년대 신문물이 밀려들던 조선에서 소멸해가는 전통문화와 신구세대의 갈등을 무당 ‘모화’와 기독교 아들 ‘욱이’의 비극적 가족사에 담았다. 이 100년 전 이야기를 안 감독이 풍부한 색채의 그림과 전통 굿소리가 어우러진 뮤지컬 음악으로 되살려냈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해 “한국 애니의 빈 공간을 채우는 작업”이라고 했다.

애니메이션 '무녀도' 첫 장면은 색색의 천을 늘어뜨린 솔밭에서 새하얀 한복 차림으로 춤을 추는 무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사진 연필로 명상하기]

애니메이션 '무녀도' 첫 장면은 색색의 천을 늘어뜨린 솔밭에서 새하얀 한복 차림으로 춤을 추는 무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사진 연필로 명상하기]

빈 공간이라니.  

“미국에서는 미키마우스, 마블 같은 것을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며 사회에 자리 잡았고, 일본은 전쟁을 겪으면서 생긴 왜곡된 민족의식을 애니 등 여러 문화 콘텐트로 발전시킨 시기가 있다. 한국의 애니는 특이하게 하청에서 시작됐다. 한국 애니가 한국인들과 함께 성장할 기간을 미국‧일본 애니에 내줘서 영혼 속에 안 남아있게 됐다. 그 빈 공간을 채워 넣고 싶었다.”

어른 되고 읽으니 '직업의 종말' 주제 와닿아

1992년 일본 애니 하청회사에서 경력을 시작한 안 감독이 창작 애니에 뛰어든 이유였다. 단편 ‘히치콕의 어떤 하루’(1998)가 그 첫 작품. 18세 소녀의 성장담을 섬세하게 그린 첫 장편 ‘소중한 날의 꿈’(2011) 이후 한국 문학 되살리기에 힘써왔다. “요즘은 사람을 죽이는 콘텐트가 잘 되는 걸 알지만 사람을 살리는 콘텐트를 하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무녀도』를 택한 이유는.  

“어릴 적 저는 종교가 없었는데 무속과 기독교 양쪽 다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집에 왔는데 굿을 하고 있더라.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부모님께 왜 이런 데 의존하냐며 싸웠다. 또 한 번은 친구 손에 이끌려 크리스마스 즈음 교회에 갔는데 그 풍경이 무녀(巫女)에게서 본 풍경과 똑같이 느껴졌다. 어릴 때 두려웠던 것을 좀 더 잘 알고 싶어져서 원작 소설을 다시 읽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모화가 겪는 ‘직업의 종말’이란 부분이 가장 크게 와 닿았다.”

‘직업의 종말’이런 주제는 ‘무녀도’가 종이와 연필로 그린 마지막 애니란 사실과도 겹쳐진다.

“한국은 이미 5~6년 전쯤 디지털로 넘어왔는데, ‘무녀도’는 종이와 연필로 그린 그림을 디지털로 변환해서 만들었다. 저희 스태프들은 ‘무녀도’가 마지막이겠지만, 저는 앞으로도 종이와 연필로 하려 한다. 디지털 애니 작업은 전 세계가 다 비슷해지는 게 있다. 픽사가 돈을 더 많이 들여서 멋있을 뿐이지 움직임이 비슷하다. 자기만의 연출법을 가져가려면 수작업이 필요하다.”

무형문화재 만신 관찰해 빚은 굿거리·음악 생생

무녀 '모화'의 얼굴과 굿거리는 만신과 여러 무녀들을 관찰해 치밀하게 고증하며 그려나갔다. [사진 연필로 명상하기]

무녀 '모화'의 얼굴과 굿거리는 만신과 여러 무녀들을 관찰해 치밀하게 고증하며 그려나갔다. [사진 연필로 명상하기]

‘무녀도’엔 그런 손맛이 생생하다. 모화의 얼굴과 굿 장면은 2년 전 별세한 국가무형문화재 김금화 만신을 비롯해 무녀들을 직접 만나고 관찰해 그려냈다. “신령님은 왜 내게 오셔서 이러십니까. 왜 내 눈에만 보이고 왜 내 귀에만 들리십니까.” 모화가 경상도 사투리로 부르는 노래들도 호소력이 강하다. 대구 출신 뮤지컬 배우 소냐가 모화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에 맞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아들 욱이의 맑은 음색은 뮤지컬 배우 김다현이 맡았다. 그대로 무대에 올려도 좋을 만큼 음악 구성이 풍성하다.

모화의 눈에 비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세상의 풍경도 황홀하다. 첨성대가 우뚝 선 경주를 무대로 철마다 산수유, 연꽃이 색색의 꽃불을 켠 풍경을 펼쳐냈다. 서양식 교회당, 양장을 입은 군중에 떠밀려 대숲에 숨어든 모화는 허공을 유영하는 잉어, 신비한 흰 소를 마주한다. 러시아계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의 풍부한 색감에도 영감을 받았단다.

행인들의 의상도 다채로운 색으로 그렸다가 최종 단계에서 대거 수정했다. 한국 근대 미술의 잃어버린 시기를 다룬 책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을 그린 그림이 대부분 색감이 아름답게 미화돼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안 감독은 설명했다.

같은 시대 그린 '귀멸의 칼날' '무녀도' 비교해 봐주길

안재훈 감독의 작업실에 걸린 '흙 묻은 손'이란 글씨는 그가 스스로 붙인 인디언식 이름이다. 실제 손으로 만지고 빚어내며 애니를 그려나가는 작업 방식과도 닮았다. 그의 책상엔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준비 중인 차기 애니 '살아오름'을 위해 그가 직접 나무로 깎고 있다는 꼭두 인형과 조각칼이 놓여있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재훈 감독의 작업실에 걸린 '흙 묻은 손'이란 글씨는 그가 스스로 붙인 인디언식 이름이다. 실제 손으로 만지고 빚어내며 애니를 그려나가는 작업 방식과도 닮았다. 그의 책상엔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준비 중인 차기 애니 '살아오름'을 위해 그가 직접 나무로 깎고 있다는 꼭두 인형과 조각칼이 놓여있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공교롭게도 ‘무녀도’의 시대 배경은 지난 10일 먼저 개봉한 일본 애니 ‘귀멸의 칼날: 남매의 연’과 겹쳐진다. 일본 다이쇼 시대로, 한국사에선 일제강점기 초기다. 도깨비에게 온 가족을 잃고 처단의 칼을 빼든 이 사무라이 소년의 복수극은 올 1월 이전 편이 개봉해 코로나 시국에도 215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안 감독은 판타지적 설정 이면에 서린 당대 일본의 역사관을 지적했다. “정작 조선은 가족마저 유지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는데 일본은 그 시기를 자랑스러워 한다. 스스로 근대화를 하면서 우월한 민족이란 자부심이 있다”면서 “그들(‘귀멸의 칼날’ 주인공)이 칼을 휘두른 대상의 일부가 조선일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을 살리려 했던 모화의 칼이 자랑스레 휘두르는 ‘귀멸의 칼날’과 다르다면서다.
16일 시사 후 간담회에서도 그는 이 화두를 다시 꺼내들었다. “100년 전의 시기를 두 작품이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다른 시각으로 다룬 두 영화를 비교해봐달라”고 그는 거듭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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