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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혜련의 휴먼임팩트

노동의 종말, 대반전을 기대하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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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기술과 노동은 지난 200년 동안 갈등 관계를 이어왔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노동 부담을 줄여주고 여유 시간을 제공했지만 새로운 기술은 생산성을 크게 개선하여 인간노동을 그만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기계를 활용한 자동화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체하여 생산직 일자리를 대신할 뿐 아니라 기계가 이제 머리를 쓰는 지적 능력까지 갖추게 되자 서비스와 사무직 일자리마저 위기에 처해 인간의 노동은 이제 설 곳이 없는 듯하다.

세계적 석학 제러미 리프킨은 1990년대 중반 그의 저서를 통해 ‘노동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설파했다. 그가 예측한 대로 산업용 로봇이 도입된 직종의 고용은 유의미하게 감소하였고 디지털 플랫폼 기술을 접목한 서비스 산업의 비대면화는 오프라인 일자리를 급속히 줄이고 있다. 최근 은행 업무의 급격한 온라인화는 평균 연봉 1억 넘는 시중 은행들의 신입사원 공채 포기를 불러와 수많은 취업준비생을 낙담시키고 있다.

블루칼라에 도전하는 청년들
본업·부업 병행하는 다중경력
기술이 인간 일자리 대체해도
사람의 끈기·저력 이길 수 없어

이처럼 고도화된 기술이 인간노동을 압도할 것이란 전망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지만 지난 2년 팬데믹 상황에서 다소 의외의 반전이 있었다. 코로나19의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의료보건 종사자 부족으로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최근 미국의 경우만 해도 업종을 가리지 않고 상당수 근로자가 자발적 퇴직을 감행하고 있는데 이유는 장기간 지속한 팬데믹 상황으로 심신이 지쳤다는 것이다. 뉴욕 시내 슈퍼마켓에 화장실 휴지가 동났는데 물류 작업할 일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율주행 자동차나 무인택배 드론 같은 첨단 기술이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의 종말과 결을 달리하는 현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취업난과 부의 대물림 현상에 청년들이 좌절하고 있다는 뉴스가 넘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굴착기·지게차 기사로 일하는 청년들이 자신들의 일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중장비 교육 훈련에서는 작업의 속도감과 섬세함이 중요한데 2030 세대는 게임기 다루듯 감각을 익힌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명문대 출신 여성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도배사로 일한다는 뉴스는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올해 기준 단순노무직 청년은 59만9000명으로 4년 전보다 12만 명가량 증가했다. 목수·도배사·중장비 기사, 그리고 농부에 이르기까지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 소위 블루칼라 직업에 청년들이 과감히 도전하는 모습에서 새삼 노동의 신성함을 깨닫는다.

노동의 반전은 본업 이외에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목격된다. 부업을 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는데 요즘 같은 상황에 직장 월급만으로 집 장만은 고사하고 결혼도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직장인 앱의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약 4명 정도가 부업 경험이 있으며 다른 직장인들에게도 추천하겠다고 답했다.

물론 기업은 직원들의 부업 활동에 대해 우려가 크고 사규로 겸업을 금지하는 기업도 많다. 하지만 주52시간제 정착과 재택근무 활성화로 시간적 여유가 생긴 사람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만 강요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최근 미국 전문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근로자의 동기가 분명한 경우 부업을 통한 자기 주도적 노동경험이 심리적 권능감을 부여하여 본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했다. 부업을 하는 목적이 경제적 이유든 본인의 적성 발휘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기 인생을 열심히 리모델링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인간의 일자리를 끊임없이 대체해도 노동을 향한 인간의 끈기와 저력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디지털 기술의 급진적 발전이 가져온 일자리의 변화에 개인 차원에서 노력하고 적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독일은 산업구조의 디지털화 정책을 마련하면서 노동정책도 함께 모색했다.

직업으로서의 노동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근로자의 재교육은 물론 전 국민 대상으로 평생 직업교육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을 위험성이 큰 근로자를 안전한 직종으로 전환하는 데 드는 훈련비용은 매년 GDP의 1~5%가 소요된다고 한다. 세금으로 확보한 국가 재정은 푼돈으로 나눠주지 말고 국민의 노동과 일자리 확충을 위해 절실하게 쓰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