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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의 독재 반성 '개인숭배금지'…시진핑 결의에서 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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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중국중앙방송(CC-TV) 메인뉴스인 신원롄보가 보도한 19기 6중전회 회의장 모습. 6중전회는 이른바 세 번째 ‘역사결의’와 ‘20차 당대회 소집에 관한 결의’ 두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사진은 지난 1일까지 로마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담장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던 왕이(王毅)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이 거수 표결하고 있다. [CC-TV 캡처]

지난 11일 중국중앙방송(CC-TV) 메인뉴스인 신원롄보가 보도한 19기 6중전회 회의장 모습. 6중전회는 이른바 세 번째 ‘역사결의’와 ‘20차 당대회 소집에 관한 결의’ 두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사진은 지난 1일까지 로마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담장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던 왕이(王毅)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이 거수 표결하고 있다. [CC-TV 캡처]

중국공산당(중공) 기관지 인민일보가 17일 1면을 포함 다섯 면에 걸쳐 지난 11일 당 연례회의에서 채택한 ‘역사결의’의 전문을 게재했다.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 이은 세 번째 ‘역사결의’다.

집단지도체제 변화 가능성 제기

하지만 덩 시대의 결의에 명기됐던 ‘개인숭배 금지’와 ‘집단지도’ 문구가 빠졌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국가주석)의 장기 집권과 당의 집단지도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미국에 버금가는 대국이 되려는 중국에 전제(專制, 혼자 결정하는 체제)가 들어서 정치와 정책의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면 세계 경제와 안전보장에 영향을 피할 수 없다”며 우려했다.

이번 결의의 정식 명칭은 ‘당의 백 년에 걸친 분투의 중대한 성과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다.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 인민대회당과 징시(京西)호텔을 오가며 열린 제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심의 채택됐다. 폐막일에는 공식 회의록인 코뮤니케(공보)에 개요 형식으로 공개됐다.

중공의 역사결의는 지난 1945년 마오쩌둥, 1981년 덩샤오핑 시대 두 차례 채택됐다. 마오와 덩은 각각 역사결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 이후 30년 이상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

지난 1981년 덩샤오핑이 주도해 일치 통과된 ‘역사결의’의 개인숭배 금지 문장. “덕과 재능을 겸비한 지도자들이 집단 지도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실행하고, 어떤 형식의 개인숭배도 금지한다”고 명기했다. 신경진 기자

지난 1981년 덩샤오핑이 주도해 일치 통과된 ‘역사결의’의 개인숭배 금지 문장. “덕과 재능을 겸비한 지도자들이 집단 지도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실행하고, 어떤 형식의 개인숭배도 금지한다”고 명기했다. 신경진 기자

특히 덩의 81년 결의는 개혁개방 방침을 기본 삼아 마오 시대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덕과 재능을 겸비한 지도자들이 집단 지도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실행하고, 어떤 형식의 개인숭배도 금지한다”고 명기했다. 또 “지도자·간부 직무에 사실상 존재하는 종신제를 폐지한다”라고도 명기했다. 독재로 폭주하지 못하도록 방지한 시스템이다.

이번 결의에서는 개인숭배, 종신제 등 독재에 제동을 걸 문구가 사라졌다. 집단지도체제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시 주석은 내년 하반기 개최될 제20차 당 대회에서 이례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세 번째 임기의 총서기 취임이 확실시된다. 닛케이는 “종신도 시야에 들어왔다”고 전망했다.

시진핑 주석이 주도한 세 번째 ‘역사결의’ 전문을 게재한 17일자 인민일보 1면. [인민일보 캡처]

시진핑 주석이 주도한 세 번째 ‘역사결의’ 전문을 게재한 17일자 인민일보 1면. [인민일보 캡처]

역사결의 거듭될수록 ‘과오’ 표기 줄어

중공은 역사결의를 거듭할수록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는 용어인 ‘착오(錯誤)’는 45년 1차 결의에 125회, 81년 2차 결의에 96회 등장한 데 비해 이번 2021년 3차 결의에서는 14차례 등장했다. 반대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성취’는 16회 등장했다. 81년에는 21회로 이번보다 많았다. 단, 착오(96회)와 실수(4회)를 합친 숫자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강국이 자기 성찰 능력을 상실할 경우 오만에 빠져 위기관리에 실패하곤 했다”고 지적했다.

3차 결의는 마오 시대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해 유감이라고 전제하고 “신중국 성립 이래 가장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겪었으며 교훈은 극히 비통했다”고 했다. 대신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정치 풍파(소동)’ ‘동란’이라는 종래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지난 1981년 2차 역사결의에서는 197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추모식이 발단이 된 1차 천안문 사건을 재평가한 바 있다. 덩의 경쟁 상대이던 화궈펑(華國鋒)을 비판하며 “노간부의 업무 복귀와 역사상 억울하고, 날조되고 잘못 판단한 사건(‘천안문 사건’ 포함)을 재평가하는 과정을 지연하고 방해했다”고 서술하면서다.

불과 2년 전 벌어진 홍콩 시위를 진압한 것도 시 주석의 13가지 업적 중 하나로 열거했다. 결의문은 “한 때 ‘반중난항(反中亂香, 중국에 반대하고 홍콩을 어지럽히다)’ 활동이 창궐했지만, 중앙에 의한 전면적인 통치와 ‘애국자에 의한 홍콩 통치’를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시 주석의 외교에 대해 “중국의 국제 영향력·호소력·구성력이 현저하게 상승했다”고 찬양 일변도로 적었다.

3차 역사결의 주요 키워드 등장 횟수.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3차 역사결의 주요 키워드 등장 횟수.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시진핑 22회 등장…마르크스 절반, 덩샤오핑 3배

시 주석이 주도한 3차 역사결의 전문은 3만6000여 자(字)로 드러났다. 45년 마오의 2만8000여 자, 덩의 3만4000여 자를 능가했다.

3중국공산당의 3차례 역사결의 등장.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3중국공산당의 3차례 역사결의 등장.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전문에 담긴 시대별 분량은 마오 시대가 약 5600자, 덩 시대와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부분은 합쳐 약 4100자를 차지했다. 반대로 9년에 불과한 시 주석 집권기는 집권 직전 중공의 당내 사정을 회고한 뒤 분야별 업적을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으로 약 1만 9000자를 차지했다.

역대 지도자의 이름 등장회수도 시 주석이 압도했다. 시진핑은 22회로 마오(18회)를 능가했고, 덩(6회)의 3배 이상이었다. 장쩌민·후진타오는 각각 1회 등장했다. 대신 마르크스는 44회 등장, 시진핑의 두 배를 차지했다.

역대 지도자가 제시한 정치사상과 이론을 이름과 떼어내 비교하면 다른 양상이 드러난다. ‘시진핑 사상’의 정식 명칭인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은 8번으로 ‘마오쩌둥 사상’ 7번을 역시 능가했다. 장쩌민이 제창한 ‘3개 대표’ 중요 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은 각각 4차례 등장한다. ‘덩샤오핑 이론’은 3회에 불과했다. 덩샤오핑 이론이 가장 푸대접당했다. 덩의 키워드인 ‘개혁개방’은 40번 등장했지만, 이 역시 시 주석의 키워드인 ‘신시대’ 47회에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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