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성소수자라고 때릴 수 있는 세상? 부모라도 싸워야죠" 투사 된 엄마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17일 개봉)은 항공승무원 비비안(왼쪽)과 소방공무원 나비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가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엣나인필름][사진 엣나인필름]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17일 개봉)은 항공승무원 비비안(왼쪽)과 소방공무원 나비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가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엣나인필름][사진 엣나인필름]

“한결이가 얼마나 힘들지 잘 실감을 못했는데 인천퀴어문화축제(2018) 가서 나도 맞았잖아요. 대명천지에 경찰들이 그렇게 많은데 성소수자란 이유만으로 때릴 수 있는 세상,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단 말이야? 부모라도 싸워야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소방공무원 ‘나비’가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에서 한 말이다. 그는 트랜스젠더인 자식 한결과 함께 혐오에 맞서는 투사가 됐다. 아들 예준의 게이 선언에 당황해 위로랍시고 “불행한 인생 살게 낳아준 엄마가 미안하다”며 오열했다는 항공승무원 ‘비비안’. 그는 2년 만에 아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동성 연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인권운동가로 거듭난다.

17일 개봉 다큐 '너에게 가는 길' #소방공무원 나비·항공승무원 비비안 #트렌스젠더·게이 자녀 커밍아웃 #이해못해 당황했지만 이젠 인권투사 #변규리 감독 "성소수자 자녀에 다가가려 #변화하고 성장하는 부모 인상적이었죠"

성소수자 자식에 다가가려 세계관 넓힌 엄마들

17일 개봉하는 다큐  ‘너에게 가는 길’은 자녀의 커밍아웃으로 갑작스레 ‘성소수자 부모’가 된 50대 두 엄마의 여정을 담았다. ‘나비’와 ‘비비안’은 이들이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얻은 활동명. 새 이름처럼 전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 엄마들의 변화가 솔직하고 유쾌하게 펼쳐진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심사위원 특별언급 및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걸 시작으로 DMZ국제다큐영화제 용감한 기러기상(특별상), 제23회 정동진독립영화제 땡그랑동전상(관객상) 등을 수상했다.

다큐를 만든 변규리(32) 감독을 13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성적 소수 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으로 출발한 창작집단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해온 그는 “부모님들이 자신의 삶을, 세계관을 확장하면서 성소수자 당사자에 다가가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길’이란 이미지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성소수자 부모도 폭력적 시선·혐오 노출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성소수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에게 어느 성소수자 장례식에 갔는데 그 부모님은 고인이 성소수자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이 아팠죠. 부모님은 고인이 생전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알수 없게 됐잖아요. 그런 와중에 성소수자부모모임을 만났죠.”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에서 성소수자 자녀를 둔 두 엄마의 이야기를 담아낸 변규리 감독을 개봉 전 13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에서 성소수자 자녀를 둔 두 엄마의 이야기를 담아낸 변규리 감독을 개봉 전 13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엣나인필름]

2017년 촬영 작업의 일환으로 성소수자부모모임 월례 정기 모임에 나간 변 감독은 새삼 성소수자 부모도 당사자 못지 않게 사회적 혐오, 폭력적 시선에 노출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아이가 성소수자가 된 것이 잘못 키웠기 때문이라든가 태교를 잘못했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올바르지 않은 정보들이 있잖아요. 또 성소수자 혐오나 비하를 들을 때 부모님들도 똑같이 불편하고 공포를 느끼죠. 자식을 위해 인권 활동을 시작하지만, 점차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하더군요.”

나비와 비비안을 주목한 이유는.  

“비비안님은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 혼란스러운 마음을 굉장히 솔직하게 표현했다. 나비님은 한결님이 커밍아웃했을 때 그것을 부정했던 데 대한 미안함, 후회가 있었고 만회해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두 분의 성장 과정을 통해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2017년 말부터 8개월간 사전 취재를 거쳐 지난해까지 2년여 본격적인 촬영을 진행했다. 나비는 한결의 법적 성별정정을 위해 부모동의서‧성장환경진술서‧남성화 가슴성형진단서‧신용정보조회서 등 18종에 달하는 서류를 함께 만들며 자식의 고충을 공감해간다. 비비안은 아들 예준의 남자친구 성준을 집으로 초대해 따뜻하게 맞아준다.

캐나다 토론토 퀴어 축제에 아들 예준과 함께 참여한 비비안은 '나의 게이 아들을 사랑한다(I LOVE MY GAY SON)'는 푯말을 들고 행진했다. 다큐에 당시 모습이 담겼다. [사진 엣나인필름]

캐나다 토론토 퀴어 축제에 아들 예준과 함께 참여한 비비안은 '나의 게이 아들을 사랑한다(I LOVE MY GAY SON)'는 푯말을 들고 행진했다. 다큐에 당시 모습이 담겼다. [사진 엣나인필름]

촬영하며 변화를 느낀 순간은.  

“부모님들이 자식의 동성 애인을 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비비안님은 그런 노력을 많이 하는 걸 느꼈다. 나비님은 생각이 진보적인 페미니스트인데 한결님한테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낯간지러워했다. 그런데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포기 사건이 있었을 때 처음으로 먼저 지금 감정을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전화를 주시더라.”

고 변희수 전 하사가 성전환수술 후 군에서 강제 전역 당했을 때도 변 감독은 “나비님이 잘 주저앉는 분이 아닌데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한결한테 어떤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사회가 이런데 열심히 버텨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 하시더라”고 돌이켰다.

내 자식 아픔 헤아리니 다른 아이 아픔도 보여 

 2018년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 때 나비가 행사 참여자를 따뜻하게 껴안는 모습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2018년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 때 나비가 행사 참여자를 따뜻하게 껴안는 모습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자식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세상의 더 많은 아픔을 껴안는 일이기도 했다. 변 감독은 “나비님이 일하는 현장에 몇 번 갔는데 소방공무원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을 거의 매일 마주하는 직업이고 그것이 나비님에게 여러 영향을 미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자살 시도 현장에 가면 청소년들도 많이 보게 되는데 한결님의 이야기를 듣고부터 혹시 저 친구도 사회적 혐오나 폭력의 시선 때문에 세상을 살기 힘들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말하신 적도 있다”고 했다.

최근 나비와 비비안은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연분홍치마와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이 다큐의 제작을 결심한 배경이기도 하다. 변 감독은 지난 6월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입법 국민청원 동의가 10만명을 돌파한 것을 되짚으며 “그런데도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차별금지법 심사기한을 늘렸다”고 지적했다. “나비님이 이를 두고 ‘우리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다’고 말하셨는데, 좌절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느껴졌어요. 우리 영화가 차별금지법을 알리는 데 작은 힘이나마 됐으면 좋겠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