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미옥의살다보면(208)
가을이 깊어간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이 가을이 마지막인 것처럼 스산한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시절이 옛날 같지 않아 낭만과 사색은 눈치 보며 따라오고, 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지출이란 녀석이 앞장선다. 한 달 전엔 남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오늘은 그때의 좋았던 기억보다 주차료, 입장료 영수증에 소심했던 기억을 꺼내본다.
차를 갖고 다니면 어딜 가든 안전한 주차장이 필수다. 고마운 장소인데 돈을 받으면 왠지 아깝다. 유명 문화재 관람에 입장료까지 비싸면 그 지출 느낌은 더하다. 이번에 다녀온 지역은 경주 근교다. 경주는 자주 다녔어도 석굴암과 불국사는 50년 전 수학여행 때 가보고 처음 들어가 봤다. 유명한 절이니 주차요금에, 입장 후 구역마다 따로 입장료를 받는다. 그 절의 신도와 지역민은 무료다. 멀리서 온 나를 반겨주기보다 신도와 지역주민 요금까지 내가 뒤집어쓴 것 같아 아깝다. 부잣집 방을 기웃거리는 것 같이 어색하다. 며칠 여행 경비에서 주차비와 입장료로 지출한 금액만 5만원이 넘었다. 이럴 땐 내가 궁상떠는 노인이 된다.
반면에 여행을 다녀와서도 기분이 좋고 오래 기억 남는 지역이 있다. 안동은 물론 가까운 영주만 해도 그렇다. 지인들이 오면 잘 가는 곳이다. 문화재를 방문하면 개방 주차인 곳이 많고 입구에서 입장료 할인 이벤트도 한다. 어느 곳은 자신이 사는 지역 끝 글자가 ‘주’자로 끝나면 할인을 해준다. 쭉 둘러서서 주민증을 꺼내놓고 복권 맞추듯 하다 보면 웃음이 있고 즐겁다. 한번은 함께한 지인들이 여주, 완주, 영주로 모두 할인이 되고 나만 안동이라 떨어졌다. 천원의 행복이다. 할인된 천 원 한장이 웃음과 재미를 주었다.
얼마 전엔 강릉 정동진을 기차로 다녀왔다. 친구가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전문직으로 취업되어 축하 여행 삼아 함께 걸었다. 한 곳에선 도시상생교류를 하는 안동지역 사람은 할인이란다. 강원도 강릉이 하고 많은 지역 중에 안동이랑 지역 교류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먼 곳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착각에 많이 행복했다. 마실가듯 강릉행 기차를 자주 타게 된다.
요즘은 입장료 정액을 내면 30~50%를 쿠폰으로 돌려주는 곳이 많다. 그곳에서만 쓸 수 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신안군 천사섬 주위도 그랬다. 입장료의 70%를 쿠폰으로 돌려주었다. 분위기 좋은 실내에서 차 한 잔을 마시거나 지역농산물로 교환해 준다. 그것은 보리쌀, 찹쌀, 흑미, 소금 등 한 컵 정도 되는 양을 일회용 티백으로 만들었다. 너무 앙증맞고 예쁘게 포장한 산지특산물이다. 지인에게 선물했더니 그들이 다시 그곳을 찾아 인증샷을 보냈다. 빠른 기차가 생긴 요즘, 차 한잔하러 서울 간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서울근교에도 이런 곳이 참 많았다. 계산상으론 더 비싼 입장료인데도 대우받는 것 같기도 하고 비싸다는 느낌이 안 든다.
볼거리가 아무리 넘치고 많아도 돈이 중계꾼인 세상이다. 할인 이벤트는 사람과 사람 간의 따뜻한 정이 오가는 것 같은 좋은 아이디어다. 한국인의 심리를 잘 이용한 것 같다. 입장료의 일부라도 돌려받으면 대우받는 것 같고 이득인 것 같은 이상한 심리 말이다.
극성이던 코로나도 서서히 시들고, 나의 일상에도 이벤트가 필요한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니 어느 땐 만사가 귀찮다. 바쁠 것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는 평범한 일상, 우울과 무기력도 함께 하는 나이다. 기분이 더 가라앉기 전에, 시간이 여유롭고 걸을 수 있을 때, 마음이 떠미는 곳이면 소풍을 떠난다. 여행으로 인해 많이 걷고 좋은 사람을 만나니 참 좋다. 그나마 잡다한 일상을 콕 집어 뒷담화처럼 나눌 수 있으니 이것도 행복한 이벤트다.
떠나는 가을을 따라 친구와 기차여행을 계획한다. 가성비 좋은 곳을 검색해가며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하는 내 마음은 벌써 여행지에서 몇 바퀴나 먼저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