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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권 없는 나라가 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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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 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 정치학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대진표가 짜였다. 매 대선마다 지지 후보의 승리를 향한 우리의 흥분과 열정은 자못 크다. 사회적 에너지의 집중과 폭발도 놀랍다. 우리 사회에서 대선은 5년에 한번씩 나라의 모든 것을 뒤바꿔놓을 듯한 기세로 모두가 빨려드는 블랙홀이 되었다.

그러나 지지 후보를 향한 열광과 반대 후보를 향한 증오의 크기에 비례하는 두 마음, 즉 대선 이후 절정의 성취감과 최악의 절망감에 비추어 우리의 공동적 삶과 나라는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1987년부터 2017년까지의 선거들을 냉정히 돌아보매 이번 선거도 본질적인 변화 전망은 어둡다. 아니, 이번 선거가 가장 나쁘다.

현행 대권, 적폐근원이자 적폐자체
생사를 건 진영 적대·갈등의 원천
대권 교체를 넘어 대권 철폐 절실
권력분립·권한분산이 상생의 해법

첫째, 대표 적폐인 진영 대결과 상호 증오의 누적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지지자 서로에게 상대 후보는 부패·비리·위선·처벌·수사대상일 뿐이다. 패배는 필히, 어쩌면 선거 도중에라도, 소환과 수사와 처벌로 이어질지 모른다. 실제로 직전 세 번의 대선을 돌아볼 때 패배는 모두 수사와 소환, 자살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보복과 반보복이 한국대선의 공식이 된 것이다. 민주선거가 공존과 통합 대신 대권과 수감, 전부와 전무, 생과 사의 투쟁이 되고 말았다.

둘째, 의회민주주의·정당민주주의 국가에서, 이제 주요 정당들은 의회 경력이 전무한 후보를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0선(選) 후보에게 다선 후보들이 모두 패배하였고, 한 정당에서는 3개월 정당 경력 후보가 26년 경력 후보를 제압하였다. 패배한 후보들은 도합 32선이었다(본경선 기준). 한 주요 정당 후보는 아예 한 번도 국민의 선택을 받아본 선출직 경험없이, 임명직 경력만으로 단번에 국가 최고 선출 공직을 맡아보라는 지지를 받았다. 반(反)정치주의와 진영주의가 얼마나 큰 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셋째로 다음 정부는 대화와 타협에 기반한 의회민주주의보다는 행정민주주의 내지는 사법민주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서로는 상대를 포퓰리즘 대 검찰주의, 행정독재 대 검찰독재라고 규정하려 한다. 우리는 이미 최근 세 대통령들이 정치적 경력과 업적을 이유로 선택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당선은 기업경력과 대통령 자녀와 탄핵사태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는 점점 더 악화되는 진영적대였다.

끝으로, 민주화 이후 나라는 더욱 커지고 발전하는데 반비례하여 대통령은 더욱 작은 지도자들이 선택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본질적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작은 후보들이 과연, 그들의 경험·식견·국량·능력에 비추어, 세계10위권 국가로 성장한 이 큰 대한민국의 미래를 끌고 갈 수 있을까? 이제 대한민국의 최대 리스크가 절대권한을 갖는 대통령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적 선호와 진영논리, 양비론과 양시론의 몽매를 뛰어넘어 이제 눈을 크게 뜨자. 좋은 제도는 작고 무능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활개를 칠 수 없는 제도라면, 나쁜 제도는 크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영대표를 선출하느라 이를 걸러내지도 못하고, 그는 끝내 제왕에 비견되는 대권을 갖는다. 우리는 5년마다 그 리스크를 반복하고 있다. 나라를 둘로 갈라놓는 절대 대권 제도 덕분에 한국사회는 진영대결을 넘어 이제 세대·젠더·계층·지역, 수도권 대 비수도권 사이의 격차와 갈등이 고질상태가 되어버렸다. 객관적인 조사와 지표들은 이를 한 눈에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 정당 소속 도지사와 문재인 정부 헌법기관장이 각각 문재인 정부의 ‘계승’과 ‘청산’을 놓고 격돌하는 현상은 오늘의 적대 실상을 웅변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 최고 권력기관의 수장이자 제1 국정과제의 집행자가 곧바로 문재인 정부 청산을 추구하는 뒤집힌 현상은, 작게는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의 정치적 실패를 뜻하지만, 크게는 진영증오와 적대정치의 성공을 상징한다.

적폐의 근원이자 적폐 자체인 현행 대권은 타파되지 않으면 안된다. 대권은 ‘가장 먼저 의견을 듣는 자’라는 뜻이다. 근대 이후 선진 민주공화국들이 국민의견을 먼저 듣기 위해 반드시 대권을 철폐하고 권한을 쪼갠 이유다. 87년에 우리는 다만 국민주권(sovereignty)을 회복하였을 뿐, 회복한 국민주권을 부여받은 권력(power)분립과 권한(authority)분산에는 극히 소홀하였다. 대권의 존속이야말로 한국민주주의 한계와 불행의 근원이었다. 전자가 주권과 민주의 원리라면, 후자는 대의와 대표, 즉 최초 민주공화국 건설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공화의 원리였다. 주권의 원칙과 대의의 원칙, 민주의 원칙과 공화의 원칙의 결합 없이 민주공화국은 결코 온전하지 않다.

대권철폐, 즉 권력분립과 권한분산이 해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와 평등, 공존과 상생, 안정과 평안을 향한 진영 철폐와 기득권 해체도 불가능하다. 대권교체는 진영교대와 기득권 교대만을 보장할 뿐이다. 최악의 대선과 대선 이후, 의회의 입법연대로부터 시작하여 연립정부 수립, 나아가 선거제와 헌법개혁을 통해 대권 없는 나라, 곧 국민과 대표의 나라를 만들자. 대권 교체는 이번으로 끝내자. 대권 철폐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