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리셋 코리아

추격자에 쫓기는 한국, R&D 혁신창업에 길 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17 00:39

업데이트 2021.11.17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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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차기 정부 정책 어젠다 ⑦ 혁신창업분과 제언-대학·연구소의 미래

2차전지 양극재 생산기업을 설립한 조재필 UNIST 교수. [중앙포토]

2차전지 양극재 생산기업을 설립한 조재필 UNIST 교수. [중앙포토]

‘메탄 기반 액체 우주로켓을 개발하는 학부생’ ‘2차전지 양극재 생산기업을 설립한 배터리 석학교수’ ‘자율주행 물류로봇 만드는 쌍둥이 형제’ ‘기업인과 교수가 힘을 합쳐 만든 바이오 신약 벤처’….

중앙일보가 지난 6월부터 격주 연재 중인 ‘연중기획 혁신창업의 길’에 소개된 기업 가운데 일부다. 대학교수와 학생, 정부 출연연구소가 연구·개발(R&D)해온 세계 수준의 혁신기술을 바탕으로 창업에 나선 모범 사례다.

연구·개발 투자 세계 1위의 역설
논문·특허 우수해도 사업화 부진
형식적 사업·기술평가 언제까지
학부 때부터 창업교육 도입해야
방울토마토 재배에 반도체칩을 적용한 이정훈 서울대 교수. [중앙포토]

방울토마토 재배에 반도체칩을 적용한 이정훈 서울대 교수. [중앙포토]

‘퍼스트 무버(First mover)’와 혁신기술의 시대다. 그간 한국 경제는 삼성·현대 등 대기업이 선진국 기술을 빠르게 모방하고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이끌어왔다. 조선·자동차·스마트폰·반도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젠 중국이 한국을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인공지능(AI)·우주기술 등은 한국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이 혁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퍼스트 무버 대열에 합류해야 할 이유다.

최근 한국의 여러 지표는 퍼스트 무버를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비 세계 2위, GDP 대비 특허 출원 세계 1위,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발표 2021 글로벌 혁신지수 세계 5위, 정부출연연구기관 2020년 사상 최대 기술료 수입 달성 등이다.

그런데도 ‘성과없는 R&D’ ‘R&D 패러독스’라는 말이 계속 거론된다. R&D 패러독스는 원래 스웨덴에서 처음 나왔다. 노벨상의 나라 스웨덴이 1990년대 세계 1위의 R&D 투자국가였지만, 산업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가리킨 말이었다. 한국도 1990년대 스웨덴처럼 패러독스의 중병을 앓고 있다. 혁신창업의 모범 사례가 있긴 하지만 아직도 R&D 성과가 혁신창업 같은 기술 사업화로 이어지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는 얘기다.

메탄 연료 기반 우주로켓을 개발하는 KAIST 학부생. 본지가 소개한 R&D기반 혁신창업의 모범사례들이다. [중앙포토]

메탄 연료 기반 우주로켓을 개발하는 KAIST 학부생. 본지가 소개한 R&D기반 혁신창업의 모범사례들이다. [중앙포토]

정부도 R&D 패러독스 상황을 부인하지 않는다. 김용래 특허청장은 “R&D 투자 규모에 비해 경제적 성과가 저조한 소위 ‘코리안 R&D 패러독스’ 문제를 안고 있어 이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해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9년 1월 대전 대덕특구를 찾아 “국가 출연연구소의 과제 성공률 99.5%가 자랑스럽지 않다”며 “그만큼 성공률이 높다는 것은 말하자면 성공할 수 있는 과제만 도전한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경제가 퍼스트 무버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R&D 패러독스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리셋코리아 혁신창업분과 자문위원들은 “국가 R&D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대학과 정부 과학기술 출연연구소에서 세계적 연구성과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혁신적 기술의 창업이 이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메신저RNA(mRNA) 기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바이오벤처 모더나나 자율주행 차량용 칩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모빌아이가 대표적 사례다. 모더나는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로버트 새뮤얼 랭어가, 모빌아이는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 암논 샤슈아가 창업했다.

김영태 KAIST 창업원장은 “이스라엘은 미국 실리콘밸리 다음으로 왕성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갖추고 있고, 미국 증시에 상장된 스타트업이 27개에 달한다”며 “그런 창업의 뿌리가 테크니언 공대나 와이즈만연구소와 같은 대학·연구소의 연구개발(R&D)이다. 우리도 대학·출연연의 R&D 기반 창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세계 1위 수준의 혁신지표에도 불구하고 ‘R&D 패러독스’가 계속 언급되는 이유는 뭘까. 퍼스트무버 경제를 위한 혁신창업이 늘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R&D 패러독스’ 극복 해법도 바로 그곳에 있다.

활용성 빈약한 ‘장롱 특허’‘장식 특허’

한국이 ‘GDP 대비 특허출원 세계 1위’를 기록한 이면부터 살펴보자. 우수 연구결과가 특허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기관이나 대학 구성원이 평가를 잘 받기 위해 특허를 남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허 등록을 하고도 실제로 사용하지 않아 ‘장롱 특허’ ‘장식 특허’라는 조롱을 받기도 한다. 특허청에 따르면 정부 R&D 사업비의 70%가 집중된 대학과 출연연구기관의 특허 활용률이 33.7%에 불과하다. 반면 국내 민간기업의 경우 특허 10개를 내면 그중 9개(활용률 90.9%)를 활용한다.

특허 등록 자체가 목적이 되다 보니, 기술보호에 허술한 경우도 많다. 배현민 KAIST 전자공학과 교수는 “한국은 특허가 몇 개 있느냐는 식으로 기관 실적을 평가하다 보니 특허를 박리다매식으로 내고 있다. 정작 특허소송에 들어가면 70% 가깝게 무효로 나온다”고 비판했다.

계속 떨어지는 기술 로열티 수입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이 발표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은 6만9618편으로 세계 12위로 나타났다. 1년 전보다 8.47%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이런 논문이 성과로 이어지는 ‘기술사업화’는 여전히 미진하다. 국가 R&D 사업의 건당 기술료 징수액이 2012년 5170만원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이후 줄어들며 2019년 2910만원으로 내려앉았다. 공공연구기관의 신규확보 기술 건수 중 기술 이전 비율을 뜻하는 ‘기술활용률’도 2015년 5.9%에서 2016년 11.2%까지 늘었으나 이후 꾸준히 낮아져 2019년에는 3.8%에 머물렀다.

대학에 기술사업화 부서가 있긴 하지만, 주로 행정직원이 돌아가면서 순환보직을 하고 있다. 전문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동기부여도 부족하다. 이 때문에 KAIST의 경우 해당 부서를 대학에서 떼어 내 민영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기존의 경직된 조직문화를 탈피하려면 민간 기업이 기술이전전담조직(TLO·Technology Licensing Office)을 담당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출연연구기관도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금창섭 빅픽처랩 대표는 “출연연에 창업 등 기술사업화를 지원해주는 인력이 있는데, 대부분 창업 경험이 없는 내부 인사들”이라며 “처음부터 혁신기술 전문 액셀러레이터와 연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벤처기업에 인재를 끌어들여야

리셋코리아 혁신창업분과 위원장을 맡은 정유신 서강대 교수는 “국내 혁신창업 스타트업들의 R&D 기반 기술은 글로벌 수준인데, 같이 일할 고급 인재를 구하기가 어렵다”며 “뛰어난 인재들이 스타트업보다 안정적이고 고소득인 대기업에 우선 취업하려고 한다. 스톡옵션 제도를 개선해 스타트업에 인재가 몰릴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스타트업은 아직 투자를 받는 단계이고, 매출은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높은 연봉을 주기도 어렵고, 직업 안정성도 부족하다. 이를 메울 수 있는 게 스톡옵션이다. “월급은 적지만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스톡옵션을 행사해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달리 스톡옵션으로 보상하려 해도 과도한 세금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스톡옵션을 행사할 때 근로소득세(또는 기타소득세) 등 45%에 달하는 최고 세율이 적용될 수 있다. 주식을 매각할 때도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

대학 내 창업 프로그램 부족하다

최근 국내대학에 창업 교육 붐이 일고 있긴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스타트업·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을 선호한다. 창업 생태계가 구비된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 벤처캐피탈 빅베이슨 캐피털의 윤필구 대표는 “스탠퍼드대나 MIT 등 명문대 학생들은 구글·페이스북 등에 취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취직 대신 창업을 해야 좀 쿨(cool)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생들의 이런 인식에는 스톡옵션 등 제도적 뒷받침도 있지만, 학부생 때부터 이어지는 창업교육·동아리의 역할도 크다. 세계 최대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업체인 미국 플러그앤플레이의 송명수 한국총괄은 “미국 주요 대학은 학부생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 능력, 비즈니스 교육 등 창업 관련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며 “대학 초년생 때부터 창업과 벤처 문화를 익힐 수 있도록 관련 교육을 필수과정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창업분과 위원들의 제언
정유신 서강대 교수, 혁신창업분과 위원장

정유신 서강대 교수, 혁신창업분과 위원장

정유신 서강대 교수, 혁신창업분과 위원장
“국내 혁신창업 스타트업들의 R&D 기반 기술은 글로벌 수준인데, 함께 일할 고급 인재를 구하기가 어렵다. 우수 인재들이 스타트업보다 대기업에 취업하려고 한다. 스톡옵션 세제를 개선해 스타트업에 인재가 몰릴 수 있도록 하자.”

최병희 청년기업가정신재단 과학기술사업그룹장

최병희 청년기업가정신재단 과학기술사업그룹장

최병희 청년기업가정신재단 과학기술사업그룹장
“스타트업을 평가할 때 현재 매출보다 미래 가치를 먼저 봐야 한다. 우리나라 벤처투자는 여전히 평가 기준이 부족하고, 안전 투자를 지향하다 보니 눈앞의 매출을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김영태 KAIST 창업원장

김영태 KAIST 창업원장

김영태 KAIST 창업원장
“이스라엘은 미국 실리콘밸리 다음으로 왕성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갖췄고, 미국 증시에 상장된 스타트업이 27개에 달한다. 그런 창업의 뿌리가 테크니언 공대나 와이즈만연구소와 같은 대학·연구소의 연구개발(R&D)이다. 우리도 대학·출연연의 R&D 기반 창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

배현민 KAIST 전자공학과 교수

배현민 KAIST 전자공학과 교수

배현민 KAIST 전자공학과 교수
“한국은 특허가 몇 개 있느냐는 식으로 기관 실적을 평가하다 보니 특허를 박리다매식으로 내고 있다. 특허 소송에 들어가면 70% 가깝게 무효가 나온다. 특허의 목적은 출원이 아니라 기술 보호다.”

송명수 미국 플러그앤플레이 한국총괄

송명수 미국 플러그앤플레이 한국총괄

송명수 미국 플러그앤플레이 한국총괄
“미국 주요 대학들은 학부생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 능력, 비즈니스 교육 등 창업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고 있다. 우리도 대학 1학년 때부터 창업 교육이 필수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금창섭 빅픽처랩 대표

금창섭 빅픽처랩 대표

금창섭 빅픽처랩 대표
“출연연에 창업 등 기술사업화를 지원해주는 분들이 있는데, 대부분 창업 경험이 없는 내부 인력들이다. 처음부터 혁신기술 전문 액셀러레이터와 연계해야 한다.”

Innovatio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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