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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은 아니었다, 100년전 서울 궁궐 점령한 '큰 고양이'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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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의 표범이 한국에 살고 있다. 이들은 서울의 성벽 인근에서 종종 총을 맞는다" - 1889년, 이사벨라 버드 비숍(영국 지리학자)

"알프레드 버트는 호랑이인 줄 알았던 큰 고양이를 쫓아 버려진 성 하수도로 갔다. 표범은 죽었다." - 1895년,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영국 화가)

조선 시대 기록상 서울 내에서 표범이 발견된 지역. 자료 UCL·ZSL 연구팀

조선 시대 기록상 서울 내에서 표범이 발견된 지역. 자료 UCL·ZSL 연구팀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의 기록 중 일부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도 서울(한양)에서 맹수인 표범을 흔히 마주칠 수 있었던 걸 보여준다. 조선 시대 호랑이뿐 아니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표범도 전국적으로 분포한 셈이다.

15~19세기 한반도에 표범이 서식한 사실을 확인한 연구 결과가 국제 학술지 '프런티어스 인 컨저베이션 사이언스'(Frontiers in Conservation Science) 최근호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특히 표범이 약 500년간 인구밀집지역인 서울에 살았다는 게 현대 인간과 맹수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 역사 호랑이 중 일부는 '표범'

논문에 참여한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과 런던동물원(ZSL)은 1870~1900년 서울의 '도시 표범'에 대한 12개 기록을 찾았다. 이 중 두 가지는 조선 왕실의 기록인 승정원일기다.

1893년 12월 12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 인근에서 5일에 한 번꼴로 '호랑이'가 나타났으며 사냥꾼들은 추적에 번번이 실패했다. 앞서 1871년 11월 27일에도 창덕궁 인근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사살됐다. 그런데 같은 시기 영국·미국·러시아 대사관의 기록은 이 동물을 호랑이가 아닌 '표범'이라고 표기했다.

조선에 살았던 아무르 표범 사진. 중앙포토

조선에 살았던 아무르 표범 사진. 중앙포토

또한 서구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큰 고양이(big cat)를 죽여달라"며 탄원서를 받거나 돈을 받고 고용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1887년까지 호랑이 가죽이 인천 항구에서 수출됐는데, 그 중엔 표범 가죽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조선 역사에 등장하는 호랑이 중엔 아무르 표범이 섞여 있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이다.

버려진 궁궐에 살며 가축 잡아먹은 듯

연구진은 당시 서울에 표범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풍부한 먹잇감과 은신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선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울엔 길거리에 풀어놓은 개가 많았고, 좁은 주택가에선 돼지들을 길렀다. 조선 왕실에서는 사슴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연구진은 이 가축들이 500년간 표범의 먹이가 됐다고 봤다.

지난 2월 촬영된 경복궁 내부 모습 전경. 뉴스1

지난 2월 촬영된 경복궁 내부 모습 전경. 뉴스1

표범이 큰 덩치를 숨긴 은신처는 오랫동안 훼손된 채 방치된 왕궁들로 추측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훼손된 뒤 약 3세기가량 비어있던 궁궐들은 맹수가 점령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서울 인근의 울창한 숲 역시 표범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낮에 버려진 궁궐이나 숲에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도심지에서 사냥에 나섰을 것이라는 게 연구진의 추정이다.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조선인들의 문화도 표범에게 유리했다고 한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큰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밤에 여행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 때문에 인간과 맹수가 만날 가능성이 줄었고, 표범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논리다.

다만 조선 시대 전국에 서식하던 표범은 일제강점기 들어 무차별 포획으로 개체 수가 점차 줄었다. 해방 이후 서식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사라지면서 1970년 이후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있으며, 러시아·중국 국경 일부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지금도 전 세계 도시에 표범 내려온다

맹수가 인구밀집지역에 서식했다는 기록은 세계적으로 아주 드물다고 한다. 우리에겐 서울 근처에 호랑이나 표범 같은 대형 육식동물이 살았다는 사실이 매우 놀랄 일은 아니지만, 세계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인도 뭄바이, 케냐 나이로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등 대도시에서도 표범이 발견되고 있다. 과거 도심 지역에선 발견되지 않던 맹수가 새로이 나타나자 이를 포획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생긴 것이다.

표범의 모습. 사진 pxhere

표범의 모습. 사진 pxhere

이런 가운데 서울에서 500년을 살았던 표범의 사례가 도심 지역에서 인간과 맹수가 공존할 수 있는 사례로 주목받았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이항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선 퓨마가, 유럽 일부 도시에선 늑대가 출현하고 있다. 서울에 500년간 살았던 표범과 호랑이의 사례는 중요한 연구자료"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물론 기술적으로 인간의 안전이 충분히 고려돼야 하는 만큼 인간과 맹수의 공존이란 논의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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