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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더는 못가겠어, 주저앉은 그때 기적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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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15화

                                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동훈이와 잠시 이별해야 한다. 좀 더 많은 경험을 하러 다른 고장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동훈이가 탈 마드리드행 기차가 마침 우리가 머무는 마을 프로미스타에 있다. 그런데 내 몸이 문제다. 며칠 전 파리를 쫒으려던 호택이 뒷발에 왼쪽 발목 위를 살짝 얻어맞았다. 약간 아프긴 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이른 아침 절룩거리며 동훈이를 보냈다. 돌아서며 동훈이가 찔끔했지만 마음 약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셋이 걷다가 이제부터는 호택이와 둘이 걷는 길이다. 중간에 작은 마을이 있다고 하지만 변변한 가게 하나 없는 구간이다.

함께 걸어온 동훈이. 아프리카 맛 좀 보겠다며 모로코로 떠났다. 헤어질 때 괜히 콧등이 시큰.

함께 걸어온 동훈이. 아프리카 맛 좀 보겠다며 모로코로 떠났다. 헤어질 때 괜히 콧등이 시큰.

걷다보니 통증이 심해졌다. 발걸음 옮기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호택이와 보조를 맞춰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줄곧 이 여행의 진정한 대장이 누구인가를 말한다.
“당나귀가 서면 저도 서고, 당나귀가 가면 저도 갑니다. 그분께서 드시면 저도 그제야 먹죠.”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사정이 이러니 내 발의 상태는 뒷전이 됐다. 보통 한 시간 걷고 10분 쉰 다음 다시 한 시간 걷고 30분 정도를 쉰다. 이때는 당나귀 짐을 모두 내리고 풀밭에 풀어놓는다. 이 규칙이 깨졌다. 10분도 못 걷고 20분을 쉬어야 하는 형편이 됐으니 말이다.

당나귀는 끊임없이 갑의 자리를 탐한다. 호택이도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을 노렸다. 호택이가 치고 나가려 할 때 제압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목줄을 단단히 당기며 위협을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앞서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두 번 째 방법으로 호택이를 눌러왔다. 내리막길에서 호택이가 속도를 내면 더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갔다.
자 따라와 보라구. 내가 너한테 질 것 같아?
호택이는 곧 속도를 낮추고 내 등 뒤에 붙어서 다소곳이 걸어온다. 오늘은 이게 불가능한 날이다. 천천히 가자고 하소연을 해야 하지만 승자는 패배자에게 냉혹하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호택이에게 이끌려 길옆에 있는 밭으로 끌려들어 갔다. 목줄을 꽉 잡았으나 이미 통제력을 잃어 막을 수 없었다. 겨우 밭 가장자리 나무에 긴 목줄을 묶었다. 밭에서 자라는 게 농작물 아닐까 걱정이 됐다.

빌빌 하는 아부지를 끌고 풀밭으로 들어간 호택이. 좋아하는 호밀 새순을 보더니 정신이 없다.

빌빌 하는 아부지를 끌고 풀밭으로 들어간 호택이. 좋아하는 호밀 새순을 보더니 정신이 없다.

이때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흰색 밴 차량이 달려왔다. 밭주인이라고 짐작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다친 발을 핑계로 하소연 하거나 배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불룩하고 흰 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엉뚱하게도 나는 본체도 않고 호택이에게 가서 귓속말을 하고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그가 내게 다가왔다.
“오스카라고 해요. 멀리서 보고 너무 반가워서 달려왔어요.”
“밭주인이신가요? 제가 배상을 할게요. 발목이 아파서 당나귀를 다룰 수가 없었거든요.”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독일에서 여행사를 운영합니다. 지금 순례자그룹을 인솔하고 왔어요. 아! 그리고 이 풀은 추수를 끝내고 떨어진 알곡이 싹을 틔운 건데요. 먹여도 됩니다. 당나귀가 제일 좋아하는 작물이죠. 메세타에 좌악 깔렸다고요.”
근심이 사라지니 발의 통증도 잠시 잊었다.
“그리고 저기 교회 보이죠? 저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거리가 반으로 줄어요. 우리 목표는 화살표를 따라 걷는 게 아니라 꼼포스텔라잖아요? 하하하”

갑자기 나타난 독일 아재 오스카.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줬다.

갑자기 나타난 독일 아재 오스카.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줬다.

화살표를 이탈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얻었다. 8km가 4km 거리로 줄어들었다. 희망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마취제다. 오스카 말대로 카리옹이 눈앞에 나타났다.

당나귀를 끌고 타운에 들어서자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호택이에게 쏠렸다. 이때 눈이 서글하고 영어가 유창한 청년이 다가왔다.
“와우! 당나귀와 함께하는 순례자군요. 정말 멋집니다.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독일에서 왔죠.”
“저는 택시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다리가 불편하신가 봐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필요는 능력의 회초리라고 했던가, 그의 영어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일단 약국에 가야 해요. 그리고 전화개통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씨에스타 시간이라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어요. 6시가 넘어야 열어요. 전화개통은 바로 저기 저 가게에서 하면 돼요. 당나귀가 함께 할 수 있는 숙소를 먼저 알아봐 드릴게요.”
다니엘 덕에 ‘산타 클라라’라는 마당 넓은 숙소를 불과 8유로에 얻었다. 약과 전화개통은 물론 잃어버린 긴 목줄과 충전용 배터리 코드도 다시 샀다.
“우리 사장님도 당나귀와 산티아고를 다녀왔어요.”
“그럼 혹시 오스카?”
“어! 어떻게 아세요? 마침 저기 있네요.”
다니엘이 큰 소리로 부르자 오스카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와우! 택시 왔군요. 약은 샀어요? 쉬어야 합니다. 다음 마을은 풀이 많은 마을 퀘사예요. 거기 가서 며칠 쉬세요. 모레부터는 며칠간 비가 온대요.”

 왼쪽이 다니엘. 가운데가 오스카. 두 사람 덕에 죽다가 살았다. 고마워요.

왼쪽이 다니엘. 가운데가 오스카. 두 사람 덕에 죽다가 살았다. 고마워요.

여기서 18km 떨어진 칼사디야 데 라 퀘사(Calzadilla de la Cueza)는 메세타 평원을 지날 때 재미없는 동네 중 하나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비가 오기 전에 가고 싶었으나 발이 문제였다.

다음날 아침 좀 나아진 듯해 길을 나서기로 했다. ‘천천히 가면 5시간이면 가겠지 뭐.’ 방심은 오판으로 연결되고 그 결과는 참혹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허연 입김이 문 앞에 와 있는 겨울을 알려준다. 가자고 하니 호택이도 신이 났다. 용기는 좋았지만 5km를 걷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치고나가려는 호택이 목줄을 당기며 걸어야하니 고통은 인내의 한계점에 다가서고 있었다. 판단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돌아갈 것인가 그대로 갈 것인가'

이제 제 뜻대로 움직이는 호택이는 풀이 무성한 밭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할 수 없이 밭두렁에 있는 나무에 묶어 놓고 풀을 뜯게 했다.
‘지팡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리는 데 작은 개울에 꽂힌 지팡이가 보였다. 길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죽은 나무인 줄 알았는데 손잡이 부분이 반들반들했다. 지팡이는 그 자리에서 오래된 듯 진흙 속에 단단히 박혀있었다.
‘이건 계속 걸으라는 신의 계시가 분명해.’
때론 이런 아전인수가 힘이 되기도 한다. 지팡이 덕에 조금 수월해져서 4km 정도를 더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팡이 약발도 다 됐다. 목표한 마을까지 10km를 도저히 갈 자신이 없었다. 캠핑을 할까했지만 추위와 물이 문제였다. 이때 전화기가 울렸다. ‘택씨. 지금 어디예요? 괜찮아요? 제가 도와줄까요?’
오스카였다. 그는 당나귀를 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스카 좀 도와줘. 내가 걸을 수가 없어."
"오케이, 10분 내로 갈 테니 기다려요.“

운좋게도 지팡이 구세주를 얻어 겨우겨우 걸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운좋게도 지팡이 구세주를 얻어 겨우겨우 걸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뒤 오스카가 차를 가지고 왔다. 함께 온 다니엘은 큰 유리잔에 맥주를 담아왔다.

"택씨, 축하할 일이 생겼네요. 한잔은 당신을 그리고 또 한잔은 횡재를 한 오스카를 위하여! 하하하"
오스카는 어제처럼 호택이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은근히 질투가 나는 건 왜 일까.
"택씨. 당나귀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당신은 다니엘과 차로 가세요."
숙소에서 도착해 한숨 돌렸다. 두 시간 뒤 오스카가 호택이를 데리고 마을로 들어서따. 난 눈물이 핑 도는데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환호했다.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호스텔 사장과 동네 사람 둘이 호택이를 끌고 사라졌다.
"오스카, 호택이 어디 간 거야?"
"걱정 말아요. 비어있는 말 농장으로 데려갔어요. 풀도 많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안락한 잠자리도 있어요."

다시 나타난 오스카가 호택이를 끌고 마을까지 걸어주었다.

다시 나타난 오스카가 호택이를 끌고 마을까지 걸어주었다.

우리가 머문 퀘사 마을 알베르게.

우리가 머문 퀘사 마을 알베르게.

호택이가 머문 9성급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건초가 푹신하게 깔려있다.

호택이가 머문 9성급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건초가 푹신하게 깔려있다.

몸을 회복하는 사흘 동안 둘이 놀며 엄청 친해졌다.

몸을 회복하는 사흘 동안 둘이 놀며 엄청 친해졌다.

저녁에 가 보니 호택이는 9성급 호텔에서 그것도 독실에서 쉬고 있었다. 바닥에는 마른 풀이 깔렸고 먹을 양식도 가득했다.
‘독사가 사는 곳엔 해독초가 자란답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해법은 바로 옆에 있다는 거죠.’ 어느 약초꾼의 말을 확인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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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체력도 회복했으니 아침 든든히 먹고 출발 준비.

어느 정도 체력도 회복했으니 아침 든든히 먹고 출발 준비.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호택아 가자.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호택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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