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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불우했던 화가? 우리가 잘 몰랐던 '뚝심 거장' 박수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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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두 여인,1962,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리움미술관[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나무와 두 여인,1962,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리움미술관[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판잣집,1950 년대 후반 ,종이에 유채 , 20.4x26.6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판잣집,1950 년대 후반 ,종이에 유채 , 20.4x26.6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서 #내년 3월까지 '봄을 기다리는 나목' #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1970년에 쓴 소설 '나목' 후기에 화가 박수근(1914∼1965) 에 대해 쓴 글이다. 박수근은 1950년대 미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는데, 당시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박완서는 박수근이 그 참혹한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가를 이렇게 증언했다.

현재 국내 약 20종의 미술 교과서에 박수근이 나온다. 명실상부한 '국민화가'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 그를 알고 있을까. 독학으로 화가가 됐고, 서민을 즐겨 그렸고, 그의 그림 '빨래터'(1954~1956)가 2007년 미술품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사실 외에 무엇을 또 알고 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가 지난 11일 개막했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총 174점으로 역대 최다 작품과 자료를 공개한다.

이 전시엔 지난 주말까지 나흘 동안 벌써 7000여 명이 다녀갔다. 막바지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덕수궁을 찾았던 사람들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박수근 작품 174점을 덤으로 만났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단순한 대규모 회고전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한 화가','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등의 수식어로만 제한되던 박수근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 두드러진다.

먼저 주목할 점은 '생계형 화가' 박수근의 면모다. 그는 당시 여느 화가들처럼 일본 유학파도 아니었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지나가고 폐허가 된 서울에서 누구보다 평범하게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 둘째,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꿋꿋이 고수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추상미술이 들어와 유행했지만 박수근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단순한 구도와 거칠거칠한 질감으로 표현한 그림을 지켜나갔다.

셋째, 박수근은 자신의 그림 안에 철저하게 자신 주변의 삶을 담았다. 절구질하고 맷돌질을 하는 아내의 모습과 시장에 앉아 있는 노인들, 동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 아기 업은 소녀들의 모습을 모두 자신의 그림으로 기록했다. 덕분에 그의 화면엔 당시 사회상, 서울의 풍경, 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던 화가가 박수근이었다.

그는 화면에서 일체의 배경을 제거했고, 간략한 직선으로 형태를 단순화했다. 특히 거칠게 마감한 표면은 '초가집 흙벽', '사찰의 돌조각' 등을 연상시키며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미감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가리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이 협업하고 유족, 연구자, 소장자 및 여러 기관의 협조로 이뤄진 대규모 전시"라고 말했다.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도 "이번 전시의 두 번째 방에 걸 대작들을 빌리는데 사활을 걸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작품을 살펴보면 숱한 협력자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이건희 컬렉션이다. 이건희컬렉션에서 나온 작품만 33점에 달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것이 31점,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이 2점이다.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고목과 여인' '나무와 두 여인'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고목과 여인'은 커다란 고목을 전면에 대담하게 배치하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인물들을 그린 구도의 작품이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박수근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간결한 구도의 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962년 작품 '노인들의 대화'(미국 미시간대 미술관 소장)는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다. 미국 미시간대학교 교수인 조지프 리(1918~2009)가 1962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샀다. 그동안 이 작품의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조지프 리가 타계한 후 미시간대 미술관에 기증되면서 공개됐다.

복숭아 1950 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28x50 ㎝, 고려대학교박물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복숭아 1950 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28x50 ㎝, 고려대학교박물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고목, 1961년, 종이에 수채,색연필, 23x52cm,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고목, 1961년, 종이에 수채,색연필, 23x52cm,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춘일, 1950년대 후반, 하드보드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춘일, 1950년대 후반, 하드보드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오는 12월 말부터 공개될 '복숭아'(고려대박물관 소장)도 기대해볼 만하다. 다양한 색과 공간의 깊이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이례적인 작품이다. 1961년에 그린 수채화 '고목'도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 중 하나다. 나무 두 그루를 담은 과감한 구도에 가는 붓질을 가로 세로로 쌓아서 바탕을 칠했다.

박수근은 평생 여성과 나무를 즐겨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고단한 노동을 하는 여성과 잎을 모두 떨군 나목은 ‘추운’ 시대를 맨몸으로 견뎌낸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박수근은 시대를 온전히 살면서 자신의 화풍으로 기록한 당당한 위상을 가진 화가였다"며 "그를 소외되고 궁핍한 화가라는 틀에 가두어 보기보다 그의 그림에 보이는 구도, 색감, 공간을 다채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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