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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은 ‘나홀로’ 현장 방문, 이건희는 “알아서 해달라”[삼성연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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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이영학 조각가 작업실에 놓여 있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두상. 김성룡 기자

서울 강북구 이영학 조각가 작업실에 놓여 있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두상. 김성룡 기자

〈이병철·이건희 동상 상편에서 이어짐〉 이영학(73) 조각가의 작업실 겸 자택은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 12일 이곳을 찾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높이 솟은 대나무가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작업실에는 유명인의 두상(頭像) 수십 개가 서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부터 고 박경리 작가 등 낯익은 얼굴들 사이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두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가의 작업실에 있는 이 회장의 두상은 두 개로, 각각 청동과 무쇠로 제작됐다. 다음은 이 작가와 일문일답.

이건희 회장 동상은 어떻게 만드셨나요.
사진도 보고, 실물도 봤지요. 한둘이 아니라 많은 형태의, ‘어떤’ 모양새가 동상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언제 만나셨나요?
이건희 회장이 이곳에 세 번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이건희 회장이 다녀간 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요(웃음). 그분이 다른 집에 잘 안 가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대통령이라고 해도 직접 봐야 동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이곳으로 찾아오셔서 사실 좀 놀랐어요. 그래도, 작업이 만만치 않았어요. 부족한 부분은 머릿속에서 해결해야 하니까요. 
이건희 회장이 동상 제작과 관련해 특별히 주문하거나 신경 써 달라고 한 부분이 있었나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작가의 작품이니까요. 다만 최대한 상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제 의도는 빼려고 했습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의뢰로 제작된 부모 흉상의 틀. [사진 김창희 조각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의뢰로 제작된 부모 흉상의 틀. [사진 김창희 조각가]

그런데, 삼성을 창업한 고 이병철 창업주의 움직임은 달랐다. 이병철 창업주는 작가에게 그리던 바를 꼼꼼하게 주문했다고 한다.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이 창업주 자신의 동상이 아닌 부모 동상 제작 때 일이다. 벌써 30여 년 전이다. 이병철 창업주는 부모의 자애로운 모습을 흉상으로라도 간직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 흉상을 제작한 김창희(83) 조각가가 전하는 말이다.

“이(병철) 회장은 평소에도 동상에 관심이 많았고 식견도 남달랐어요. 흉상을 제작하려면 얼굴은 물론 옆과 뒷모습까지 다 있어야 해요. 그런데 당시엔 (이 창업주 부모의) 사진 밖에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병철 회장이 눈에 보이듯, 그림을 그리듯 설명을 해줬습니다. ‘어머님의 머리는 쪽진 모양으로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일러주셨지요. 그 효성에 감복했습니다.”

휴일에 비서도 없이 와서 점검

김 작가는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서울시립대 환경조각학과를 만든 국내 유명 조각가다. 그는 이 창업주가 작업 상황을 보기 위해 일요일과 공휴일, 두 번 전농동 작업실에 찾아온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 강북구 이영학 조각가 작업실에 놓여 있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두상. 김성룡 기자

서울 강북구 이영학 조각가 작업실에 놓여 있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두상. 김성룡 기자

“대학 본부에서도 이병철 회장이 찾아온 것을 몰랐습니다. 건물에 들어와야 하니까… 수위나 알았을까. 수행 비서도 없이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 여사, 장조카인 이동희 제일병원 설립자와 같이 오셨어요. 대기업 회장이 직접 찾아와 작업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흔치 않았습니다.”

김 작가는 이날의 인연으로 고 이동희 박사의 흉상도 제작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동상에 대한 애착은 더 이어졌다. 이 작가는 이 창업주의 의뢰로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 동상 등도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장군 동상 제작도 지원  

이영학 작가는 동상을 세우는 이유에 관해 “기업이라면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어 동상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고, 그 업적을 우뚝 서게 하려는 의지”라고 풀이했다. 일반인에게는 고인을 기리는 추모의 뜻이 있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 동상.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건희 회장 동상.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기업인 동상 공공의 장으로 나와야” 

한국 경제사에서 상징적 족적을 남긴 기업인의 동상을 ‘공공의 장’으로 끌어내 발자취를 새기자는 견해도 나온다.

『동상으로 만난 이병철·정주영·박태준』을 쓴 이상도 작가는 “공적 공간에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그 인물이 광장으로 나오는 것이고, 그러려면 시민들이 그 인물을 인정해야 한다”며 “우리나라에 독립운동가, 정치인, 예술·체육인의 동상은 많지만 경제인은 손에 꼽힌다. 공적 공간에 동상으로 남은 인물은 이병철·정주영(현대 창업주)·박태준(포스코 명예회장) 정도”라고 말했다.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 전경. [사진 진주시]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 전경. [사진 진주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동상을 제작한 이영학 조각가가 12일 서울 강북구 작업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동상을 제작한 이영학 조각가가 12일 서울 강북구 작업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광장에 세워진 이병철 동상의 의미

이 작가는 “경제인이라고 하면 비자금이나 탈세 등 부정적 단어를 먼저 떠올리는 국내 풍토에서 이병철 회장의 동상이 공원의 역할을 하는 옛 제일모직 터에 당당하게 세워진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이런 동상이 광장에 나오면 이들의 도전정신과 미래 의지를 배우고 되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특유의 상징성을 부여하면 기업인 동상이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 옛 지수초등학교 사례가 대표적이다. 2009년 인근의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되면서 지금은 건물만 남은 곳이다.

이곳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비롯해 고 구인회 LG 창업주, 고 허만정 GS 창업주,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리모델링을 거쳐 내년 2~3월께 기업가정신 교육센터로 ‘부활’할 예정이다. 한국의 경제부흥과 세계화를 이끈 굴지 기업인들의 생애를 만날 수 있는 전시실도 생긴다고 한다.

이상도 작가는 “이렇게 한국의 기업사·경제사가 숨 쉬는 공간에서, 그 주인공들이 후세대와 동상이라는 ‘현장의 숨결’로 만나는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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