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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기밀 넘기고 방산업체 간 중령…'취업약속' 쓴 수첩에 발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권총 일러스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권총 일러스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방산업체 대표 '집유' 

'B사장 미팅', '공장 소개 직접 2시간', '금암동에서 소고기 소주 2병', '코드 맞고 해볼 만함'….

전직 육군 중령 A씨(54)가 2015년 8월 14일 자신의 육군수첩 달력에 적은 글이다. 이날은 그가 전북 완주군에 있는 방위산업체를 방문해 대표 B씨(63)를 만난 날이었다. A씨는 육군이 도입하려는 차기 기관단총과 기관총, 저격용 총과 관련된 군사 기밀을 B씨가 운영하는 방위산업체에 유출한 혐의로 최근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창원시와 방위사업청이 지난 6월 23일 경남 창원시 창원컨벤션센터(CECO)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2021 방위산업 부품·장비 대전'에서 관람객들이 소형 기관총 등을 보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창원시와 방위사업청이 지난 6월 23일 경남 창원시 창원컨벤션센터(CECO)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2021 방위산업 부품·장비 대전'에서 관람객들이 소형 기관총 등을 보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퇴역 후 방산업체 취업한 중령 징역 4년

전주지법 형사12부(부장 이영호)는 “지난 11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과 뇌물공여·뇌물약속 혐의로 기소된 방위산업체 대표 B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고 15일 밝혔다. C씨(66) 등 전·현직 임원 2명에게는 징역 1년~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나머지 임원 1명은 징역 6개월에 선고유예를 내렸다. 이 임원의 범행이 한 번에 그친 점 등이 참작됐다.

B씨 등은 2015년 8월부터 지난해까지 A씨를 통해 5.56㎜ 특수작전용 기관단총, 5.56㎜ 차기 경기관총, 신형 7.62㎜ 기관총, 12.7㎜ 저격소총 사업 등과 관련된 2∼3급 군사 비밀 문건을 불법 수집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해당 문건들이 외부로 유출되면 군의 전술적 의도와 중·장기 전략이 노출돼 국가 안전 보장에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B씨는 "금품과 향응은 제공했지만, 취업은 약속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법원은 "군사 기밀 누설과 취업 제공 사이에 대가 관계가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퇴역 후 한 달 만에 B씨 회사에 이사로 취업한 육군 중령이 현역 시절 B씨 등을 만날 때마다 대화 내용 등을 기록한 육군수첩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인 전장 가시화 체계 구성. 개인정보처리기는 상용 스마트폰이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 방위사업청

개인 전장 가시화 체계 구성. 개인정보처리기는 상용 스마트폰이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 방위사업청

차기 기관단총 개발 등 군사 기밀 유출 

앞서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지난달 6일 A씨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을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군사법원 재판부는 A씨가 건넨 정보가 B씨 회사 측이 2016년 방위산업체로 지정되기 전부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대가성이 있다고 봤다. 2018년 11월 육군 중령으로 퇴역한 A씨는 그해 12월 B씨 회사에 방위사업총괄이사로 입사해 2019년 12월 퇴직했다.

도대체 방위산업체 대표는 왜 현직 군 간부에게 접근했고, 30년 가까이 군에서 복무한 장교는 무엇 때문에 군사 기밀을 넘기게 됐을까. B씨의 1심 판결문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B씨는 1992년 11월 총기·자동차·정밀주조 사업과 연구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2015년 1월 군용총포 제조업 허가를 받았고, 2016년 8월 방위산업체로 지정됐다.

지난달 1일 제73주년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 경북 포항시 남구 도구해안에서 특전사 요원들이 대형 태극기와 함께 강하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지난달 1일 제73주년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 경북 포항시 남구 도구해안에서 특전사 요원들이 대형 태극기와 함께 강하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경기관총 개발 사업 수주 목표…군 간부 접근

검찰에 따르면 B씨가 군에서 발주하는 완성 총기 도입 및 연구 개발 사업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건 2014년부터다. 이를 위해 방위산업체 지정을 추진하는 한편 2014년 9월 서울사무소도 열었다.

그 무렵 B씨는 군인 출신 임원 C씨로부터 '군의 사업 추진 계획과 제안 요청서를 사전에 확보해야 한다' 등의 보고를 받고 이를 승인했다. C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모 방위산업체 직원에게 부탁해 2014년 10월 대전 한 식당에서 당시 육군 교육사령부에서 근무하던 A씨를 소개받았다.

C씨는 검찰에서 "A씨가 방위사업청의 총기 사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고, 군사 기밀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 등을 볼 때 잘하면 A씨에게 사업 수주에 필요한 군사 기밀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B씨는 2015년 A씨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차기 경기관총 체계 개발 사업'을 수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이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중구보건소를 방문해 수도권 역학조사 지원 임무를 맡은 특전사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이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중구보건소를 방문해 수도권 역학조사 지원 임무를 맡은 특전사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재판부 "'콜'은 취업 제안 수락 의미"

B씨는 경쟁 업체보다 먼저 군사 기밀을 확보하면 사업을 수주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A씨에게 공을 들였다. B씨 등은 2015년 8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A씨를 강원도 부대 내 숙소 등에서 만나 군이 추진 중인 사업 계획 등이 담긴 군사 기밀 문건을 휴대전화로 촬영하거나 다이어리에 옮겨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 대가로 A씨에게 모두 93차례에 걸쳐 식사·술을 대접하거나 현금과 상품권 등 588만원 상당의 금품을 건넸고, 전역 후 일자리도 약속했다.

B씨와 A씨는 "군사 기밀 누설과 취업 사이에는 대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2018년 2월 6일 A씨가 육군수첩 달력에 기록한 '콜(with근무)'과 '사장 근무 콜' 등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A씨는 'B씨가 2018년 2월 6일 취업을 처음 제안했고, 그 뒤로도 두세 번 취업을 제안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며 "이는 A씨가 육군수첩에 기재한 내용과 일치해 믿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 A씨는 B씨 등을 만날 때마다 모임 장소와 교통편, 대화 내용 등을 세세하게 육군수첩 달력에 적었다.

재판부는 "B씨 회사에서 임원 취업에 관한 결정 권한은 대표이사인 B씨가 가지고 있고, A씨 육군수첩 2018년 2월 6일자에 기재된 부분 외에 A씨가 이후 B씨와 취업에 관한 협의를 진행했다는 내용이 없으며, A씨가 B씨 회사에 입사한 점 등을 보면 '콜(with근무)'와 '사장 근무 콜'은 B씨의 취업 약속을 A씨가 수락했다는 의미로 봄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씨는 B씨를 만난 약 2주 뒤부터 군사 기밀을 제공했다"며 "이 과정에서 오로지 B씨 회사에 대한 선의로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 기밀을 제공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수수한 금품 및 편의 제공 규모도 다량의 군사 기밀 제공의 대가로 보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제73주년 국군의 날 미디어 데이가 지난 9월 30일 경북 포항시 남구 도구해안에서 열린 가운데 특전사 요원들이 해안으로 강하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제73주년 국군의 날 미디어 데이가 지난 9월 30일 경북 포항시 남구 도구해안에서 열린 가운데 특전사 요원들이 해안으로 강하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방위사업청, 계약 파기 여부 결정

B씨 회사 인사팀장도 검찰에서 "A씨의 경우 B씨 지시로 입사지원서를 받기 전인 2018년 12월 채용품의서를 작성해 B씨 승인을 얻었다"며 "당시 국내 영업부에는 임원이 없었고, A씨가 채용되면서 임원 자리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A씨의 이례적인 취업 절차와 조건은 그동안 A씨가 B씨 등에게 군사 기밀을 제공해 줬기 때문으로 보이고 그 외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했다.

앞서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6월 38억원 규모의 차기 특수작전용 기관단총 1형(체계 개발) 사업의 연구·개발 우선 협상 대상으로 B씨 회사를 선정하고 그해 10월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7월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B씨 회사를 압수수색해 불법 유출된 군사 기밀들을 찾아냈다.

안보지원사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국방부 검찰단과 전주지검은 올해 B씨와 A씨 등 5명에게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방산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방위사업청은 지난 6월 특수작전용 기관단총 개발 사업을 잠정 중단했다. 아울러 B씨 회사에 대해 지난달부터 1년간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당업자 제재를 의결했다. B씨 회사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와 서울행정법원에 이를 취소해 달라고 청구했고, 현재는 청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제재 효력이 정지된 상태다.

방위사업청은 B씨 등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온 만큼 조만간 계약 파기 여부와 개발 사업 재검토 등을 결정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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