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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시진핑은 왜 과거를 지배하려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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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남긴 명언이다. 오웰이 소설을 탈고한 건 1948년이지만 그의 예언적 명제는 2021년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연상케 한다. 지난주 막을 내린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새로운 역사결의가 채택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웰을 떠올린 건 필자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의 현재를 지배하는 이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다. 그는 현재뿐 아니라 중국의 미래를 지배하길 꿈꾼다. 그는 ‘2기 연임, 10년 집권’의 제한을 깨고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닦아둔 상태다. 남은 건 명분과 정당성이다. 이를 위해 역사 해석을 새롭게 하는 것, 즉 과거를 지배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새로운 역사결의를 채택한 건 과거 지배를 통한 현실 지배, 나아가 미래를 지배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결정판이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결의 채택이 이번을 포함해 단 세 차례뿐이란 점에서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덩샤오핑과 선 그은 신시대 선언
국제사회와의 불화 충돌 불가피
먼 훗날 역사가의 평가는 어떨까

과거 두 차례의 역사결의는 노선 투쟁의 결과물이자 총괄이란 공통점이 있다. 1945년 결의는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론이 레닌주의 교리에 매달리는 소련 유학파들의 노선을 꺾었다는 승리 선언이었다. 마찬가지로 1981년의 역사결의는 마오 사후 벌어진 노선 투쟁에서 “마오는 무조건 옳다”는 화궈펑(華國鋒)의 범시론(凡是論)을 물리친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승리 선언이었다. 만일 그가 범시파를 이기지 못했더라면 중국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시진핑은 누구와 무엇을 놓고 싸워 이겼는지가 불분명하다. 집권 초기 강도 높은 반부패 캠페인으로 여러 명의 거물급 간부를 추풍낙엽처럼 실각시켰지만 이를 두고 당과 국가의 진로를 놓고 싸운 노선 투쟁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오와 덩이 그랬던 것처럼 당과 국가의 기본노선을 전환하려 한다. 이는 “마오쩌둥이 중국을 일어서게 했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부유하게 했으며, 시진핑은 중국을 강하게 할 것”이란 말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덩샤오핑의 노선과 선을 긋는 게 필요하다. ‘시진핑의 신(新)시대’론은 바꿔 말하면 덩샤오핑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시진핑과 덩샤오핑의 차별성은 크게 보아 두 가지다. 하나는 선부론(先富論)을 공동부유, 즉 공부론(共富論)으로 전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 종언을 고한 것이다. 공부론의 추구는 사회주의 이념과 원리에 보다 더 충실할 것임을 의미한다. 한때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한다고 하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 시진핑은 사회주의를 구하는 새로운 지도자가 되려 한다. ‘시진핑의 신시대 사회주의 사상’을 ‘21세기의 마르크스 주의’로 규정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미·중 대결이 가치의 격돌을 수반하는 신냉전으로 확대될 것이란 불길한 전망에 더 힘을 보탠다.

도광양회의 종언은 보다 더 직접적으로 국제사회와의 불화 내지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덩샤오핑은 내 재능을 숨기고 힘을 기르라는 도광양회로도 모자라 “절대로 남의 앞에 서지 말라”는 결부당두(決不當頭)의 가르침을 남겼다. 그의 유훈은 “누구든지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란 공언 앞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과거를 지배하는 역사결의 채택에 성공함으로써 시진핑의 위상은 마오쩌둥 및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로 격상됐다. 그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이나 그가 지배할 가까운 미래엔 틀림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먼 훗날 이뤄질 역사적 평가에서도 마오나 덩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의 치세도 언젠가는 또 다른 과거가 되고, 당대의 권력자는 그 과거를 다시 지배하려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