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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아름다움을 찾아 누리는 일, 감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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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음악의 실제는 연주가 끝난 후 우리의 귀에 남아있는 떨림에 있다.” 레바논의 작가 칼릴 지브란(1883~1931)은 이렇게 ‘감상자의 심상에 새겨진 것이 그 음악의 실제’라고 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 또한 비슷한 구절을 남겼다. ‘소리 없는(연주를 마친) 지금이 (비파를) 탈 때보다 더하도다(此時無聲 勝有聲).’ 심양의 강나루에서 한 많은 여인의 비파연주를 청해 들으며 써 내려 간 칠언절구 ‘비파행(琵琶行)’의 한 구절이다.

그림을 ‘보고’ 연극과 무용을 ‘관람’하고 음악을 ‘듣고’ 난 후 남아있는 그 무엇이 그 작품의 실제라는 이 말의 속뜻은 예술이 우리네 심상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보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상’함으로써 우리는 그 작품에 최종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연주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들을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휘자 아바도(1933~2014)가 연주자 상호 간 음악적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말이지만, 들을 줄 아는 것이 곧 음악을 한다는 것이라 했으니 그 역시 예술이 감상 단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음악의 실제는 심상에 새겨진 것
느낌을 넘어 인지하고 분별하는
객관적·주체적·합리적 미적 체험

이렇듯 예술 활동의 중요한 축이자 궁극적 지향점이라 할 수 있는 ‘감상’의 의미와 가치를 학생들과 논하면서 이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 ‘느낄 감(感)’ ‘형상 상(狀·象·像)’ 또는 ‘생각할 상(想)’이라고 답한다.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예술을 ‘느낌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상당수의 청중이 음악에서 막연히 무언가를 느끼려고만 하는 것을 탓해 온 것이 부질없는 짓 아니었나 싶다.

독자들이야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감상의 한자어는 분별·안목·식견 등을 뜻하는 ‘거울 감(鑑)’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상줄 상(賞)’이다. 그래서 그 사전적 정의는 ‘(주로 예술작품을) 감식하여 그 성질·효과·가치 등을 깊이 음미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감상의 영어단어 ‘appreciation’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적 가치를 인지하는 것(recognition of aesthetic values, 웹스터 사전)’이라고 간단히 설명한다. 느낌(感)이 외부자극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라면 인지와 분별(鑑)은 이성적 영역에 속한다. 느낌이 ‘표면에 드러난 것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라면 내용(예술적 현상)을 객관적·주체적·합리적으로 파악하는 여정 끝에서 만나는 것은 미적 체험을 통한 ‘형이상학적 희열’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감상하라는 것인가? 앞서 언급한 백거이의 ‘비파행’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살짝 스쳐 느긋이 누르고 비비거나 튕겨내니…, 큰 현(絃)은 급하기가 소나기가 내리붓듯, 작은 현은 애절하게 귀엣말로 속삭인다. 급한 소리 애절함을 어지럽게 튕겨내니, 큰 구슬과 작은 구슬 옥쟁반에 구르는 듯, 간주하듯 꾀꼬리 소리 꽃꽃마다 흘러가고, 흐느끼는 냇물 소리 얼음 되어 사라진다. 시냇물이 얼어붙듯 현을 막아 멈춰 드니, 멈춰 붙듯 안 통해서 소리 점차 줄어들자, 따로 있듯 깊은 시름, 없던 한이 일어나니, 소리 없는 이 시간이 탈 때보다 더하구나.’

TV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라디오에서 축구 중계하듯 생생히 전달하니 1200년 전 가여운 한 여인의 비파 연주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감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렇게 감흥을 끌어내는 과정을 세세히 추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영역은 전문가 몫일 뿐 감상과는 별 관계 없는 것들이다.

몇 달 전, 경제인들의 조찬 모임에서 짧은 강의를 마치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참석자 중 한 분이 ‘음악가의 길을 내딛는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을 요청했다. 강의는 유창(?)하게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요청에 말을 더듬었다. 아니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가 가장 뚜렷한 분야가 바로 음악이다. 대중음악과 달리 대중미술, 대중무용, 대중연극은 낯설다. 날로 성하는 대중음악과 달리 날로 쇠하는 순수음악계에 발을 들이는 이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열정으로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이들에게 꽃길은커녕 가시밭길을 물려주는 못난 선배로서 조언은 언감생심, 그저 “미안하다, 고맙다”가 할 수 있는 말 전부였다.

대중예술을 폄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순수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은 대중예술을 즐길 때보다 수십 배 더 집중하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야 가능하다. 투자 대비 효용? 그것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덤으로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미래의 음악가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