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원전 없애고 가장 더러운 연료 늘린다? 골치 아픈 독일 '탈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힘들게 확보한 친환경 에너지로 원자력 발전소의 공백을 메꾸는 건 오히려 후퇴하는 것이 아닐까?”

네덜란드 흐로닝언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사이먼 프리드리히 교수의 고민이다. 그는 녹색당을 지지하는 가정에서 자란 환경론자로, 1980년대 이후 독일의 탈핵 기조를 지지해온 중심 세대다. 어린 시절 체르노빌의 참상을 담은 책을 보며 원자력 에너지에 반발했던 그는, 이제는탈핵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독일 전력회사 라인베스트팔렌전력(RWE)이 운영하는 화력발전소. [AFP=연합뉴스]

독일 전력회사 라인베스트팔렌전력(RWE)이 운영하는 화력발전소. [AFP=연합뉴스]

獨 국민들“안 그래도 비싼 전기 더 비싸지나” 한숨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확고한 탈핵 기조를 유지해온 독일 국민이 과거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현실에 주목했다.

이에 따르면 최근 독일인들은 국제 유가‧천연가스‧석탄 가격이 동시에 급등하는 현실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체 발전량의 약 25%를 석탄에서, 16%를 천연가스에서 얻고 있기에 안 그래도 비싼 전기‧난방 가격이 더 오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천연가스 소비량의 55%를 최근 공급 제한 논란이 일고 있는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원유·천연가스(LNG)·석탄 가격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인베스팅닷컴, 한국자원정보서비스(KOMIS)]

원유·천연가스(LNG)·석탄 가격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인베스팅닷컴, 한국자원정보서비스(KOMIS)]

독일 일간 타게스슈피겔은 지난 3일 “베를린의 최대 가스 공급 업체 가작(Gasag)을 시작으로, 독일 내 주요 가스 공급 업체들이 조만간 요금 인상안을 내놓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5%가 오른 전기요금도 당분간 급등세가 이어질 전망이다.

독일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전기가 비싼 나라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메가와트시(MWh) 당 333.9 달러(약 40만 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 중 가장 높으며, 한국(MWh 당 102.4달러)의 3배 수준이다. 전기요금에 재생에너지 부담금 21%, 열병합발전·해상풍력 부담금 3.3% 등이 붙어서 청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9월 독일의 소비자 포털 베리복스(Verivox)가 독일 전역의 만 18~69세 인구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독일인 4명 중 3명은 “정부가 에너지 가격 인하를 위해 시급히 대응해야 한다”고 답했다.

탈핵 국민적 합의했지만, 환경 딜레마에 주목

이런 전력난 속에서 ‘가장 더러운 연료’라는 석탄에 대한 요구도 늘어나면서 기존 탈핵 지지자들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설문 응답자 중 31%는 “전기요금 안정화를 위해 원자력 발전을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지난 2018년 같은 질문에 대한 긍정 대답이 11%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지난 9월 24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기후파업 시위에서 청소년들이 다양한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참석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9월 24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기후파업 시위에서 청소년들이 다양한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참석했다. [AFP=연합뉴스]

독일은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한 1983년을 기점으로 탈핵 논의를 본격화했다. 이후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2011년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가 전국적인 원전 반대 집회로 이어지며 탈핵은 독일의 사회 보편가치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이 체르노빌에서 110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독일 전역에서 꾸준히 방사성 물질인 세슘이 검출되는 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후 2011년 6월 전체 원전 17기 중 노후원전 8기를 멈춰 세우고, 2015~2019년 사이 3기의 원전의 가동을 추가 중단했다. 현재 남은 원자로는 6기에 불과하다. 이 중 3기는 올해 연말까지, 나머지 3기는 2022년까지 가동을 중단해 완전한 탈핵을 완성한다는 구상이다.

독일 원전 운영회사 RWE. [AP=연합뉴스]

독일 원전 운영회사 RWE. [AP=연합뉴스]

문제는 올해 북해 등의 바람이 이례적으로 잠잠해 풍력발전량이 급감했다는 점이다. 친환경 에너지의 생산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당장 전체 전력의 11.3%를 차지하는 원자력 에너지를 대체할 수단이 많지 않다. DW는 “전문가들은 원자력으로 생산하던 전력의 손실을 신재생에너지 생산으로 메울 수 없어 석탄과 천연가스를 더 많이 태워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13일 독일 매체 디벨트에 따르면 독일 내 에너지 전문가들은 최근 공개서한을 통해 “독일의 탈원전 기조가 우리의 2030 기후 목표를 놓치게 만들었다”며 “현재 남은 원전을 적어도 2030년에서 2036년까지는 유지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원전 유지 주장의 ‘정치적 대가’는 무한

다만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정치권이 응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독일 언론들의 분석이다. DW는 “독일 내에서 원전 수명 연장을 주장하는 것의 정치적 대가는 거의 무한(almost infinity)에 가깝다”며 “선출된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리드리히 교수도 “물론 나의 생각은 독일 내에선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2021 독일 총선 득표율, 녹색당 총선 득표율 변화 그래픽 이미지.

2021 독일 총선 득표율, 녹색당 총선 득표율 변화 그래픽 이미지.

탈핵 시민운동이 당의 기원이 된 녹색당의 정치적 성장도 원전 운용 연장 논의를 꺼내기 힘들게 만드는 요소다. 올해 총선에서 역대 최대 득표율 14.8%를 기록한 녹색당은 제1당이 된 중도 좌파 사민당(25.7%)과 친기업 성향의 자민당(11.5%)과 ‘신호등 연정’(사민당-빨강, 자민당-노랑, 녹색당-초록) 협상을 벌이고 있다. 16년 만에 물러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정부를 이을 차기 연립정부에 ‘녹색등’이 켜질 것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독일과 다른 길 걷는 영·프

지난 9일(현지시간)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아홉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신규 원자로 건설을 재개한다고 밝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FP=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아홉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신규 원자로 건설을 재개한다고 밝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FP=연합뉴스]

독일과 달리 이웃 영국과 프랑스 등은 신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오는 2050년까지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원전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프랑스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원자로 건설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 날 영국 정부도 항공·에너지 업체 롤스로이스가 진행하는 차세대 소형모듈형원자로(SMR) 개발 사업에 2억1000만 파운드(약 3358억 원)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