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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시상식때 이 말하는 연예인 마음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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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갈릴리 호숫가의 어느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다. 예수가 짚은 여덟 개의 마음, 여덟 개의 행복 가운데 ‘깨끗한 마음’에 눈길이 간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장 8절)

예수의 표현은 갈수록 직접적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땅을 차지하다가, 드디어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걸 가능케 하는 ‘깨끗한 마음’이란 뭘까. 그리스어로는 ‘카타로스(Katharos)’다. ‘카타르시스(Katharsis)’와 어원이 같다. 뭔가를 씻어 내리는 것이다. 그게 깨끗한 마음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했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했다.

그런데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우리는 수시로 몸에 쌓인 때를 씻는다. 그런데 돌아서면 때가 생긴다. 자고 나면 또 때가 생긴다. 몸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음도 그렇다.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씻어내려도 때가 낀다. 잠시 눈만 돌려도 때가 낀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쯤 온전하게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될까. 우리는 언제쯤 하느님을 보게 될까.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의 주인공이다. 종교개혁가가 되기 전에 그는 가톨릭 사제였다. 수년 전에 독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루터가 가톨릭 수도자로 살았던 곳이다. 수도원에는 루터 당시 고해성사를 하던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10~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야트막한 계단이 하나 있었다. 그 계단의 별명이 ‘루터의 계단’이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에 가톨릭 수도사였다. 나중에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에 가톨릭 수도사였다. 나중에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독일 비텐베르크. 보름스의 공원 광장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위클리프, 프리드리히 제후,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독일 비텐베르크. 보름스의 공원 광장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위클리프, 프리드리히 제후,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열정적인 수도자였다.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한 뒤 방을 나왔다. 걸어서 계단까지 가다가 급히 뛰어 되돌아왔다. 방에서 나와 계단까지 가는 사이에 또 마음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되돌아온 루터는 다시 고해성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계단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렇듯 사람의 마음이란 돌아서면 때가 묻고, 다시 돌아서면 또 때가 묻는다. 깨끗한 마음이 되어서 하느님을 보기란 쉽지 않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종종 거울에 비유한다.  『육조단경』에는 마음과 때의 관계를 놓고 두 수도자가 벌이는 한판 대결이 담겨 있다. 선(禪)불교사에서 유명한 장면이다. 달마의 법맥을 잇는 오조(五祖) 홍인대사가 시험 문제를 냈다. “게송(깨달음의 시)을 한 수씩 지어라.” 제자들의 안목을 보고 깨달음의 문턱을 넘은 자가 있으면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다.

훗날 중국 북종선(北宗禪)의 대표 주자가 되는 신수(神秀, 606~706)가 먼저 답안지를 냈다. 그는 거울과 때에 대해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거울에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라고 썼다.

신수는 마음이라는 거울이 있고, 그 위에 먼지가 쌓인다고 보았다. 루터의 방식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털고 털고 또 터는 식이다. 깨끗한 거울이 드러나게끔 말이다. 홍인 대사는 그 답안지를 보고서 이렇게 채점했다.

“범부는 여기에 의지해 수행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는 않겠다. 그러나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문 앞에 왔을 뿐,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낙제는 면했지만 합격은 아니었다.

중국 광저우에 있는 남화선사에 모셔져 있는 혜능 대사의 등신불이다. 혜능은 달마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중국 선불교의 제6대 조사다.

중국 광저우에 있는 남화선사에 모셔져 있는 혜능 대사의 등신불이다. 혜능은 달마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중국 선불교의 제6대 조사다.

당시 행자(승려 견습생) 신분이었던 혜능(慧能, 638~713)도 답안지를 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그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이렇게 적었다. “마음의 거울은 본래 깨끗하다. 그러니 어느 곳에 먼지로 물들 것인가!” 혜능은 아예 거울을 깨버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울의 형상’, ‘마음의 형상’을 깨버렸다.

그는 왜 거울을 깼을까. 마음은 몸뚱아리(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의 몸’을 만들어놓고 먼지가 쌓인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혜능은 그 착각을 깨버렸다.

홍인대사는 혜능의 답안지도 채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혜능은홍인대사(五祖)의 뒤를 이어 중국 선불교의 법맥을 잇는 육조(六祖)가 됐다.

신수의 방식으로는 깨끗한 마음이 되기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수행해도 먼지가 끊임없이 거울 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혜능의 방식은 다르다. 그는 먼지의 정체부터 뚫었다. 먼지란 무엇인가. 지저분한 마음이다. 혜능의 눈에는 지저분한 마음도 마음이고, 깨끗한 마음도 마음이다.

혜능은 마음의 속성을 깊이 들여다봤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빈자리에서 나왔다가 잠시 작용하고 다시 빈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마음은 작용만 할 뿐 비어 있다. 그게 마음의 정체다. 그러니 혜능의 눈에는 마음도 몸이 없고 먼지도 몸이 없다. ‘빈 곳’에 ‘빈 것’이 묻을 수가 없다. 그걸 깨칠 때 비로소 ‘깨끗한 부처님 나라(淸淨佛國土)’가 드러난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위에 기대 기도를 하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새겨져 있는 조각상이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위에 기대 기도를 하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새겨져 있는 조각상이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였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 20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예수에게도 ‘나’가 없고, 바울에게도 ‘나’가 없다. ‘무아(無我)의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을 향해 모든 걸 내맡기는 것이다. 슬픔의 감정도 기쁨의 감정도 내던져야 한다. 두려움도 분노도 영광도 남김없이 내맡겨야 한다.

시상식장에서 큰 상을 받을 때 사람들은 “이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한다. 그저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내가 영광을 움켜쥐면 깨끗한 마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던지는 순간 내 마음이 깨끗하게 포맷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이를 ‘전적인 위탁(Total Commitment)’이라고 부른다. 그런 ‘무아의 영성’을 통해 ‘없이 계신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강하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구원받은 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주셨으니까. 그런데 굳이 깨끗한 마음이 왜 필요한가?” 이렇게 따진다. 과연 뭘까.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의미는 대체 뭘까.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우리 시대의 저주는 교회에 예수가 없는 '예수 결핍 장애'라고 강조했다.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우리 시대의 저주는 교회에 예수가 없는 '예수 결핍 장애'라고 강조했다.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미국 드루 신학대학교 석좌교수) 박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매우 존경받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 대신 그동안의 성공 그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세대나 축복이 있고 저주가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저주는 바로 ‘예수 결핍 장애’입니다.”

스윗 박사는 결핍을 채우려면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맛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습니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습니다. 성경에선 하느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 관점)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관이나 교리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수는 굳이 산상수훈을 설하지 않았을 터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관점’을 설하지 않았다. 삶의 사막에서 허덕대는 우리의 목을 축여주는 건 관점이 아니다. 대신 예수는 생수를 건넸다. 마음의 버튼을 누르고, 마음이 작동하게 하는 ‘진짜 물’이다. 거기에 길이 있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행복과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길을 설명했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행복과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길을 설명했다.

나는 언덕에 난 오솔길을 따라서 갈릴리 호수로 내려갔다. 푸른 호수와 푸른 하늘, 그리고 푸른 바람 속에서 예수가 설한 ‘깨끗한 마음’을 묵상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장 8절)

짧은 생각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입니다.
루터가 촉발한 불꽃, “예수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개신교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톨릭 수도원의 수사였습니다.

독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루터가 수도자로 살았던 곳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황제나 귀족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역설했다.

마르틴 루터는 황제나 귀족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역설했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굉장한 규모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저명한 대학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순례객들이 꼭 들르는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루터의 계단’입니다.

루터는 참 치열한 수도자였습니다.
고해성사를 하고 돌아서서 나오면
루터는 그 계단을 통해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통과하기도 전에
루터의 마음에는 ‘죄를 짓는 마음’이 생겨난 겁니다.

그 마음을 느끼는 즉시,
루터는 다시 고해소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고해성사를 하고
다시 나와 그 계단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계단을 다 지나기 전에
마음에 ‘죄 짓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김없이 루터는 다시 고해소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루터는 고해하고, 계단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오고
고해하고, 계단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와 고해하는 일을
숱하게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그 계단에 붙은 별칭이 ‘루터의 계단’입니다.

저는 그 계단 앞에 서서 눈을 감았습니다.
마음을 온전히 포맷시키려는
수도자의 치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맷되지 않는 인간의 한계.
그 앞에서 루터는 또 얼마나 절망했을까요.

당시에는 성경이 라틴어로만 돼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라틴어를 읽을 줄도, 쓸 줄로 몰랐습니다.
교회 미사 때 사제가 라틴어로 뭔가를 읊어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일부 귀족과 지식인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직접 성경을 읽고, 뜻을 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수염을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독일의 고성에 숨어서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수염을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독일의 고성에 숨어서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라틴어 성경을 루터는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른 채,
독일의 고성(古城)에 숨어서 독일어 성경 번역을 완수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있었던 인쇄 혁명은
루터의 개혁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독일어 성경은 순식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라틴어를 아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도
직접 예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루터의 계단 앞에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개혁의 심장이 무엇이었을까?”

그건 한 인간이 신을
1대1로 만나고자 하는 절박함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물건을 거치지 않고,
어떤 공간을 거치지 않고,
어떤 사람을 거치지 않고,
내가 하느님을 직접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 말입니다.

그런 간절함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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