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없이 거인 살릴 수 있을까...군산서 국내 최초의 실험중

중앙일보

입력 2021.11.13 05:00

업데이트 2021.11.13 12:09

9년 간 방치됐던 전북 군산의 군산시민문화회관. 지금 군산시에서는 이 덩치 큰 건물을 보조금 없이 재생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9년 간 방치됐던 전북 군산의 군산시민문화회관. 지금 군산시에서는 이 덩치 큰 건물을 보조금 없이 재생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저 덩치 큰 거인을 마약 없이 살릴 수 있을까?

지금 전라북도 군산시 나운동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국내 최초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마약은 정부의 보조금을 뜻하는 업계 은어다. 보조금 없이는 되살아날 수 없다고 여겼던 곳은 군산시민문화회관이다.

1989년 문화회관이 문 열었을 때만 해도 인기 만점이었다. 대지면적 9451㎡에 858석의 객석을 갖춘 공간은 놀 거리 없는 당시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하지만 영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에 2㎞ 떨어진 곳에 군산 예술의 전당(1200석)이 지어졌다. 결국 쓸모가 없어진 문화회관은 매물로 나왔지만, 123억짜리 대형 건물을 사려는 이는 없었다. 더욱이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인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인지라, 철거도 어려웠다.

김중업 건축가(1922~1988)가 설계한 군산시민문화회관의 내부.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김중업 건축가(1922~1988)가 설계한 군산시민문화회관의 내부.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군산시민문화회관의 과거 모습.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군산시민문화회관의 과거 모습.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공교롭게도 문화회관이 있는 동네, 나운동의 상황도 비슷했다. 나운동 인근에 신도시가 연이어 들어서자 사람들은 새 동네의 새 아파트로 떠났다. 문화회관은 그렇게 낡고 사람 떠난 동네에 남겨졌다. 연간 전기세만 2억원이 드는 이 건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군산시는 지난해 국책연구기관인 건축공간연구원의 윤주선 부연구위원에게 SOS를 쳤다. 윤 박사와 군산시는 영화동 시장 골목을 살리는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은 적 있었다. 그의 해법은 이랬다. “민관협력 자립형 도시재생으로 살려봅시다.” 건물이 지어진 지 32년 만에 보조금 없이 홀로 서게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른바 PPP(Public Private partnership) 형 도시재생이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며 민간에게 위탁운영을 맡기는 식의 민관협력이 아니다. 민간은 보조금 없이 자립해야 하고, 정부는 착한 건물주 역할만 하면 된다. 대신 건물 안에 일정 부분 수익 시설을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번 돈의 일부로 공공시설도 운영해야 한다. 한국 최초의 시도이지만, 이미 해외에서는 널리 쓰인다. 일본의 경우 2015년부터 인구 20만 이상의 도시는 낡은 공공건축물을 재생할 때 PPP 사업을 먼저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뒀을 정도다. 왜 그럴까.

‘세금 먹는 하마’가 된 공공건물

탄광 도시였던 일본 홋카이도 유바리시(夕張)는 2006년 파산했다. 석탄산업이 쇠퇴하고 인구가 급격히 줄자, 유바리시는 관광산업으로 도시재생에 나섰다. 국가 보조금을 대거 투입해 공공시설을 마구 지었지만 돌아온 것은 더 큰 적자였다. 세금 낼 시민은 없는데, 건립비의 수배에 달하는 운영비를 감당하기 벅찼다. 결국 시는 파산선고를 했고 공공서비스는 마비됐다. 구급차조차 운영하지 못할 정도로 도시는 망가졌다.

유바리시뿐 아니라 일본 전역의 보조금 위주 재생 사업의 경고등이 일제히 켜졌다. 지역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률적인 재생사업의 결과는 뻔했다. 윤 박사는 “일본 총무성에서 분석한 결과 보조금 중심의 재생사업의 94%가 망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보조금을 받으면 버티다 끊기면 더 나빠지는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보조금은 마약’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말했다.

보조금 위주의 도시재생을 비판해 온 일본의 도시재생전문가 키노시타 히토시가 그린 다이어그램. 그는 '보조금=마약'에 비유한다.  [사진 키노시타 히토시 홈페이지]

보조금 위주의 도시재생을 비판해 온 일본의 도시재생전문가 키노시타 히토시가 그린 다이어그램. 그는 '보조금=마약'에 비유한다. [사진 키노시타 히토시 홈페이지]

한국에서도 도시재생이 트렌드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부터 5년간 50조원을 투입하는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짧은 기간 안에 성과를 보여줘야 하니 건물을 새로 짓거나,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주축이다. 청년 몰, 스타트업 사무실, 메이커스 스페이스 등과 같은 유행 아이템이 전국의 도시재생사업에서 ‘복붙’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창업공간의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기본적인 조사도 없이 일단 콘텐트를 정하고 리모델링해서 테이프 커팅식하고 끝내는 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말했다. 수요 예측이나 사업성 검토 없는 마구잡이 재생의 결과는 뻔하다. “못생긴 빈집이 예쁜 빈집이 됐을 뿐”이라는 자조적인 평가가 벌써 나온다.

‘마약’이 되어버린 정부 보조금

더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의 인구구조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저출산ㆍ고령화 시대를 겪고 있다.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인구 특별추계(2017~2067년)’에 따르면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다. 100명의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부양하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올해 23명에서 2067년 102.4명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청년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에 정부가 지금처럼 보조금을 펑펑 지급할 수 있을까.

그래서 떠오른 것이 PPP형 도시재생사업이다. 인구 3만5000명의 소도시, 일본 이와테현 시와쵸의 ‘오가르 프로젝트’는 유명한 성공사례다. 2007년부터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재정상태가 좋지 못한 지자체는 소유한 유휴부지를 민간에 30년간 저렴하게 빌려줬고, 민간은 그 땅에 공공시설과 수익시설을 하나씩, 하나씩 짓기 시작했다.

100회가 넘는 주민 설명회를 토대로 수요부터 파악하고 임차인을 확보해 공간을 만들어간 결과 공실은 없다. 주민들이 염원하던 공공도서관이 들어섰고, 그 옆에 이자카야와 병원, 학원, 지역 장터 등도 생겼다.

 일본 이와테현 시와쵸의 ‘오가르 프로젝트’는 PPP 도시재생의 성공사례다. [사진 시정촌 아카데미]

일본 이와테현 시와쵸의 ‘오가르 프로젝트’는 PPP 도시재생의 성공사례다. [사진 시정촌 아카데미]

공공은 저렴하게 땅을 빌려주고, 민간은 수익시설을 통해 번 돈으로 공공도서관도 운영한다. [사진 시정촌 아카데미]

공공은 저렴하게 땅을 빌려주고, 민간은 수익시설을 통해 번 돈으로 공공도서관도 운영한다. [사진 시정촌 아카데미]

공공도서관 옆 이자카야의 모습.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공공도서관 옆 이자카야의 모습.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다시 군산시민문화회관으로 돌아가 보자. 윤주선 박사팀은 지난해 6월부터 새 판을 짜기 위한 밑그림부터 새롭게 그려야 했다. 사업 절차부터 바꿨다. 관 주도로 공간부터 일단 만들고 콘텐트를 정한 뒤 이를 운영할 민간 운영자를 뽑던 방식을 뒤집었다. 운영자부터 뽑아서 그 운영자가 콘텐트를 정해 공간을 매만질 수 있게 했다. 윤 박사는 “공공은 착한 건물주 역할만 하고, 민간에서 최대한 자율성을 갖고 콘텐트를 만들고 운영해 돈이 지역으로 순환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32년 만의 홀로서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의문스럽다. 문화회관은 낙후한 나운동에서, 정말 보조금 없이 자립할 수 있을까. 군산시는 일단 월세를 대폭 낮췄다. 감경조항을 박박 뒤져 공유재산법에 따라 4700만원에 달하는 월세를 466만원으로 낮췄다. 임차 기간은 20년, 연간 인상률은 5%로 제한했다.

건물이 잘 운영되려면 동네도 살펴야 했다. 윤 박사 팀은 나운동 일대의 사람들을 만나며 지역 여건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운동에는 과거 문화회관을 주축으로 활동하던 예술들이 꽤 많이 살고 있고, 군산 호원대에는 K팝학과도 있었다. ‘생활예술’의 가능성이 보였다.

윤주선 박사팀은 운영자를 뽑기 전 군산시민문화회관의재생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시범 운영했다. 옥상에 대형 스케이트 보드장을 설치한 모습.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윤주선 박사팀은 운영자를 뽑기 전 군산시민문화회관의재생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시범 운영했다. 옥상에 대형 스케이트 보드장을 설치한 모습. [사진 건축공간연구원]

윤 박사 팀은 이를 토대로 두 차례에 걸쳐 문화회관을 시범 운영했다. 건물 옥상에 대형 스케이트 보드장을 설치하고 홍보해 사람들이 얼마나 모이는지 조사했고, 지역 사람들만으로 행사를 운영해 인적자원의 가능성도 모두 살폈다. 윤 박사는 “건물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민간팀이 참고할만한 여러 콘텐트 실험과 지역 조사 기록을 세세히 만들었다”고 말했다.

군산시민문화회관은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약 1년 5개월만인 지난달에 민간팀을 뽑는 공모절차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절차도 독특하다. 우선 30페이지짜리 기본제안서만 받아 두 팀을 뽑았다. 그리고 뽑힌 팀과 함께 공모전 심사 방식이나 규칙을 함께 만들었다. 민간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주기 위해 기존 틀을 깨는 과정이었다.

이를 토대로 다음 달에 최종제안서 심사를 연다. 윤 박사는 “단순한 심사가 아니라 문화회관에서 무엇을 어떻게 운영할지 영화 예고편처럼 현장에서 보여주고, 주민투표도 받아 이를 심사위원들이 참고하게 할 예정”이라며 “민간 운영팀이 선정되면 마지막으로 내년 봄에 건물을 리모델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산시민문화회관의 PPP 도시재생을 맡고 있는 건축공간연구원의 윤주선 박사, 이혜원ㆍ김보미ㆍ채아람 연구원(왼쪽부터).

군산시민문화회관의 PPP 도시재생을 맡고 있는 건축공간연구원의 윤주선 박사, 이혜원ㆍ김보미ㆍ채아람 연구원(왼쪽부터).

군산시민문화회관도 국토부 뉴딜 사업 중 하나로 추진되고 있다. 다른 사업들처럼 건물 리모델링 비는 지원받는다. 하지만 ‘보조금 제로’의 실험대로, 이후 지자체가 지급하는 고정적인 운영비는 받지 않을 계획이다. 이 남다른 행보 덕에 현재 문화회관의 공정률은 꼴찌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다른 사업들은 이미 공사에 들어간 곳이 수두룩하다. 윤 박사는 “여러 압박도 많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어 다른 지자체에서 도전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군산시민문화회관의 자립기는 현재진행형이다. 1년 뒤에 이 여정을 또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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