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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좌교수 안 되겠니?” 친구에게 물었다가 ‘퇴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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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호 24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37〉건방진 얘기 

조영남씨는 지난해 가을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상(1910~1937)이 아인슈타인·니체·피카소·말러 못지 않은 천재였다는 주장을 담았다. 그런 생각을 표현한 조씨의 2019년 작품.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는 지난해 가을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상(1910~1937)이 아인슈타인·니체·피카소·말러 못지 않은 천재였다는 주장을 담았다. 그런 생각을 표현한 조씨의 2019년 작품. [사진 조영남]

이걸 36번이나 썼다. 중앙SUNDAY 연재 말이다. 이젠 대여섯 번만 더 쓰면 끝난다. 이젠 한번 점검을 해볼 때가 된 것 같다. 무슨 점검이냐. 잘썼냐 못썼냐. 이 연재를 쓰면서 얻은 건 뭐고 잃은 건 뭐냐. 잠시 서서 뒤돌아보는 거다. 대강 결과가 나왔다. 좋은 건 뭐고 나쁜 건 뭐냐. 좋은 건 많다. 옛날 일을 돌아보면서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 그런 건 참 좋았다. 나쁜 점도 있다. 나빠도 더럽게 나쁜 점 하나가 발생했다. 오늘 그걸 시원하게 털어놓겠다.

나는 늙은 사람이다. 어감도 껄쩍지근한 꼰대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못하랴. 짧게 말하겠다. 중앙SUNDAY 독자님들께는 삐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 조영남이가 어느새 시건방진 인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만하고 기고만장해졌다는 얘기다. 나는 지금 무슨 드라마를 쓰는 게 아니다. 그동안 나는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저 적절한 소시민이었다. 때론 겸손도 하고 때론 배려도 베풀 줄 알았다. 그러다가 나는 달라졌다. 우쭐해졌다. 내가 최고다. 나는 누구보다도 우수한 사람이다. 마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처럼 매사에 나만이 적임자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친구 유영구, 야구위원회 총재 역임

왼쪽부터 가수 김세환, 조영남씨, 유영구씨. [사진 조영남]

왼쪽부터 가수 김세환, 조영남씨, 유영구씨. [사진 조영남]

며칠 전이다. 나는 평소 마치 초중고 동창처럼 가깝게 여겨지는 친구 유영구한테 물었다. 참고로, 유영구는 명지대학 창립자이신 유상근 장로님(나는 김장환 목사님과 함께 유 장로님과도 친하게 지냈었다)의 큰아들이다.

“야! 영구야. 나 니네 학교 석좌교수로 들어가면 안 되겠니?”

물론 여럿이 밥 먹다가, 김세환도 거기 있었다,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내 시건방짐의 결정판이 되는 것이다. 봐라. 나는 한양음대 중퇴, 서울음대 중퇴, 미국 시골 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겨우 학사학위밖에 없는 주제에 명지학원 이사장을 지낸 영구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또 참고사항. 영구는 TV 나왔던 “영구 없다”의 그 영구가 아니다. 내 친구 영구는 정치인 출신 정대철 형과 서울대 총장 출신 겸 국무총리 출신인 내 후배 정운찬(학번이 두 단계나 밑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한테 꼬박꼬박 선배님 선배님 한다)이 역임했던 한국야구위원회 총재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한테 내가 석좌교수 운운해댔으니 얼마나 가소로운 얘긴가.

석좌교수. 어감부터 멋지다. 난 석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돌 위에 앉은 부처 대신 돌 위에 선 교수라는 뜻인가. 일찍부터 나는 교수 직함에 뜻이 없었다. 교수 안 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 건 내 동생 조영수 때문이다. 내가 ‘딜라일라’를 불러 겨우 마련했던 동부이촌동 시범아파트를 팔아 조영수 유학비를 마련한 건 바로 내 어머님 되시는 김정신 권사님이셨다. 내 동생 조영수는 10년간 독일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 곧장 부산음대 교수 자리에 앉는다. 나는 늘 듣곤 했다. 조영수니까 당연히 조 교수라고 불렸다. 최근까지도 조영수에 대한 칭호는 한결같이 조 교수였다. 쭉 조 교수로 머물렀다. 내가 한양음대, 서울음대를 제대로 졸업하고 어느 대학교수가 됐다면 별수 있었겠는가. 나 역시 조 교수로 시작해서 조 교수로 끝났을 것이다.

결국 나는 조 교수도 못 되고 그냥 조 가수가 되어 잘 나가다가 어느 날 검찰에 불려가게 된다. 소위 미술 대작 사건으로 사기꾼 혐의를 쓰고 재판정에 서기에 이른다. 졸지에 전 국민의 비호감 대표 인물로 둔갑, 미술품 환불 사건과 5년간의 변호사 비용으로 집만 가진 알거지로 둔갑, 어깨가 축 늘어졌던 초라한 인물, 잊혀져간 가수로 빌빌대는 신세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나는 다시 기고만장한 인간으로 마블 영화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그럼 내가 왜 이렇게 됐냐. 누가 너를 그렇게 변신시켰느냐. 답은 간단하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중앙SUNDAY에 매주 써내는 이 망할 놈의 원고가 메인 원인이다. 틀림없다. 그게 무슨 소리냐. 생각해보시라. 중앙SUNDAY 애독자 제위들이시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날 붙들고 중앙SUNDAY 글 잘 썼다, 재미있다, 끝내준다, 짱이다! 심지어는 중앙일보를 안 봤었는데 당신 연재 때문에 일부러 구독해서 본다고 한다. 물론 나를 만났으니까 예의 차원에서 지나가는 말로 한다는 사실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반복해서 들어보시라. 사람이 교만해지지 않을 방도가 있는가를! 더구나 우리의 한국문화를 훤히 꿰뚫어 보시는 문화대통령격인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이나 소설가 김홍신 선생으로부터 한번 거르는 일도 없이 매번 글 잘 쓴다는 칭찬을 듣고,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독일 쪽의 박사 출신 잘 나가는 심리학자 김정운 같은 이로부터 “왜 그렇게 글을 잘 쓰는 거야? 형이 나보다 글을 더 잘 쓰는 것 같아. 미치겠어” 이런 말을 듣고, 그리고 이름을 밝혀서는 안 되는 이 나라 최고위 인사로부터 지속적으로 글 잘 쓴다는 칭찬을 들어봐라. 그 기분이 어떤가를. 자연스럽게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게다가 내 못생긴 얼굴 사진이 매주 신문에 실려 나가지 않느냐? 그러니 내 코가 클레오파트라보다 더 높아질 수밖에!

조영남씨가 출간한 단행본 책등을 모아 만든 2012년 작품 사진.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가 출간한 단행본 책등을 모아 만든 2012년 작품 사진. [사진 조영남]

그리하여 나는 급기야 지난주 명지학원 이사장을 지낸 내 친구 유영구한테   겁대가리 없이 물었던 거다. “야! 영구야! 내가 니네 학교 석좌교수하면 안 되겠니?”하고 말이다.

그런데 영구 녀석은 밥을 씹으면서(녀석은 대식가다) 영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얀마! 석좌교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인마!”

이게 웬일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영구한테 따귀를 얻어맞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중앙SUNDAY 애독자님이시어! 그래도 나는 할 말을 하겠다.”

“좋다, 해보거라.”

그럼 들어보시라. 나는 자랑이 아니라(물론 자랑도 섞였지만) 실로 많은 책을 썼다. 어느 누구보다 많은 책을 써냈다. 우선 나는 한국 청년의 마음으로 바라본 『예수의 샅바를 잡다』(2000년)를 쓰고, 이어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려는 의미에서 일본이나 중국에도 없는 빼어난 예술가 백남준이 우리한테 있고 노벨문학상을 탄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또 미국의 노벨문학상 작가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보다 열 배, 스무 배나 우수한 시인 이상(李箱)에 대해 썼다. 세계 문화계는 긴장하라, 까불지 말라며 쓴 책이 우리 시인 이상의 난해한 시(詩) 해설서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2010년)라는 책이었다. 그 책에서 심지어 나는 이상을 감히 영국의 셰익스피어 바로 옆자리까지 올려놓았다. 재판의 와중에도 5년의 유배생활에도 옛 성현의 흉내를 내서 두 권의 책을 냈다. 한 권은 재판을 하는 판사도 변호사도 검사도 현대미술의 원리를 모르고 헤매는 듯해서 일찍이 쓴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2007년)에 이어서 아주 쉽게 쓴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2020년 7월)이었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뜬금없이 그룹사운드를 결성했다. 무슨 그룹이냐. 세계 최고의 악사들을 끌어놓은 세계 최초의 음악그룹이다. 그런 내용으로 쓴 책이 바로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2020년 9월)이다. 이상이 리드싱어, 늘 기타를 미술로 표현했던 피카소를 기타 주자로, 일찍부터 피아노를 배워 24살에 바젤 대학교수가 된 철학자 니체에게 피아노와 키보드를 맡겼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나중에 독일음악의 최고봉 바그너와 친분까지 맺었다. 원래부터 바이올린 A급 주자였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그리고 타악기를 교향곡의 제왕 구스타프 말러한테 맡겼다. 이런 게 책 내용이다. 건방짐의 절정이다.

김종규·김홍신 등 연재 글 칭찬해줘

건방진 얘기가 계속 이어진다. 난 딱 한 번 한 학기 동안 대학 강단에 선 기록이 있다. 2000년 전후 무렵이다. 이때 난 경기도 안성의 동아방송예술대학 실용음악과 겸임교수였다. 내 강의 시간은 오후 2시였다. 내 생애 첫 대학 강단에 올라선 나는 매우 짧게 “저는 이번 학기 실용음악을 담당하게 된 조영남입니다. 저의 강의 시간은 오후 2시입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가타부타 말없이 그대로 돌아서 나와 퇴근해버렸다. 다음 주에 갔을 때 지각하는 학생들이 단 한 명 없이 2시 정각에 교실에서 쫙 대기하고 있었다. 두 번째 강의 시간도 매우 짧았다. 3분 이내였다. 내 두 번째 강의는 대충 이랬다.

“나는 몇 번 대학을 다녀봤습니다. 그런데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도 따로 안 한, 주제를 길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교수가 딱 맘에 안 들었습니다. 나는 음악 그리고 미술, 그 밖에 이성 문제 따위 등에 다방면의 흥미를 느끼곤 했습니다. 자! 그럼 질문이 있으신 학생은 질문을 해주십시오. 내가 아는 대로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용했다. 아무런 질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이 없으므로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하고 즉시 뒤도 안 보고 돌아서 나왔다. 다음 시간에 갔을 땐 학생들이 각자 노트에 빼곡히 질문들을 적어 가지고 왔다. 그 후 3개월 동안 무사히 강의를 끝냈다.

“야! 영구야! 친하다는 게 뭐냐. 나를 니네 학교 총장 한 번 시켜보는 게 어떠냐?”

뭐 날아오는 소리. 피융. 슛. 탁. 이번엔 화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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