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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계산원도 누군가의 아내·엄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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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호 21면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이소진 지음
갈라파고스

서지향씨는 지방의 4년제 대학생이었다. 딸이 돈 벌지 않고 공부한다고 아버지가 싫어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했다. 다행히 공기업에 취직해 사내 결혼을 했지만 친정엄마는 “아이 먼저 낳아야”, 남편은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만뒀다. 아이는 당장 생기지 않았고 전업주부 생활에 지친 나머지 제약회사 전화상담원으로 다시 취업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겼고 회사를 다시 그만뒀다.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서지향씨. 지금은 한 대형마트에서 캐셔(계산원)로 일한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긴 주부들이 노동시장으로 재진입하는 흐름에 서씨도 합류한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일한 지 8년째. 그런데 마트 노동자로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서씨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나같이 그냥 아무것도 몰라. 이거 해! 이러면 네! 이거 해! 이러면 네! 이런 거 좋아한대요.”

마트가 그런 캐셔, 그러니까 자기 생각이나 의견이란 건 없는 수동적인 근로자를 좋아한다는 얘기다.

한 대형마트의 계산대. 여성 계산원들은 차별적인 임금과 처우로 고통받는다. [연합뉴스]

한 대형마트의 계산대. 여성 계산원들은 차별적인 임금과 처우로 고통받는다. [연합뉴스]

이런 진술은 우리가 아는 캐셔와 차이 난다. 흔히 마트 캐셔는 누구누구 엄마라는 이미지가 있다. 절박하지 않은 노동자, 용돈벌이 나선 가정주부인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 따르면, 서씨가 일하는 대형마트의 경우 남편 직업이 개인택시·경찰공무원·공사직원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럴 경우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에 만족할 가능성이 있다. 임금 상승 욕구도 크지 않을 거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든 캐셔가 다 그럴까. 서지향씨처럼 자기 목소리라고는 없는 돈벌이를 8년씩이나 한다는 건 용돈 이상의 절박함이 있다는 얘기 아닐까. 책의 바탕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계기는 따로 있다. 저자 어머니의 인생사가 기막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버스 안내양을 거쳐 ‘기술의 상징’ 금성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결혼 직후 전업주부의 삶을 잠깐 살았다. 곧 집에서 쇼핑백을 접는 부업을 시작했고 옷가게 점원, 함바집과 김밥집 아줌마를 거쳐 지금은 화장품 공장에서 일한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란 저자, 2018년 문재인 정부의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이 반가웠다. 서지향씨가 일하는 대형마트가 선제적으로 임금 감소 없이 표준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하자(주 40시간→주 35시간) “드디어 한국에도 이런 회사가” 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들은 마트의 그런 결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저자는 2018년 하반기 문제의 대형마트에서 4개월간 주말 스태프, 그러니까 마트로서는 주휴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주 14시간 이하 초단시간 근로자로 일한다. 물론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결과는 여성 캐셔들의 노동현실이 겉보기와 딴판으로 척박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뿌리 깊은 임금 차별에 시달린다. 자녀 있는 여성은 온전히 업무에 헌신하지 못할 수 있다고 보고 임금 페널티를 주지만 남성은 반대로 임금 프리미엄을 주는 현실 말이다. ‘고분고분’을 강요당한 끝에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캐셔들은 마트 손님이 불합리한 요구를 해도 그것이 정말 불합리한 요구인지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결과는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사과다. 서지향씨 마트의 선제적 조치도 문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임금은 줄었고, 노동강도는 세졌다. 그 틈새를 저자 같은 ‘초단시간’들이 메웠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는 방법은 뭘까. 대형마트만 때릴 일은 아닌 것 같다. 노동 정의만 부르짖기에는 닥쳐오는 산업재편의 파고가 문외한에게도 아찔해 보여서다. 적어도 앞으로 캐셔가 굼뜨다는 이유로 몰아세우지는 않을 것 같다. 계산업무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훌륭한 노동현장 르포인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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