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을 때 이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의 법정 투쟁 과정을 그린 니시지마 신지 감독의 영화 ‘표적’의 장면들.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11/13/422910b9-e2ce-4317-a562-dd6dc1b3331a.jpg)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을 때 이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의 법정 투쟁 과정을 그린 니시지마 신지 감독의 영화 ‘표적’의 장면들.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
세계적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대히트를 치고 있는 가운데 한국 넷플릭스 순위를 보면 ‘오징어 게임’ 못지 않게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도 인기가 많다. ‘오징어 게임’ 같은 자극적인 작품도 좋지만 나는 ‘차차차’ 같은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로 정신 없는 일상을 잊는 시간이 좋다. 매 주말 ‘차차차’로 마무리하는 시간이 힐링이었다.
예상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났는데 따뜻한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주연 김선호 배우의 사생활에 관한 논란이 엄청난 속도로 커졌다. 방송 하차, CF 위약금 등 뉴스가 줄줄이 이어졌다. 전 여자친구가 폭로했다고 하는데 사생활에 대해서는 본인들밖에 모르는 문제다. 전 여자친구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을 것이다. 논란에 휩싸이면 그 논란에 대한 검증도 없이 순식간에 일을 잃어버리는 걸 보면서 무섭다고 느꼈다. 전 여자친구의 폭로에 대한 거짓 의혹도 불거지고 있는데 어쨌든 그럴 만한 일인가 싶다. 아마도 김선호 배우가 지금 가장 핫한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반응이 컸던 것 같다.
방송 허가 안 내줘 퇴직하고 영화 찍어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을 때 이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의 법정 투쟁 과정을 그린 니시지마 신지 감독의 영화 ‘표적’의 장면들.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11/13/77c80093-f01d-44ff-a6ac-5362a156774a.jpg)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을 때 이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의 법정 투쟁 과정을 그린 니시지마 신지 감독의 영화 ‘표적’의 장면들.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
몇 년 전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가 ‘날조 기자’라는 논란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일본에 있기 힘들 정도 심한 공격을 받아 최근 몇 년을 한국에서 지내기도 했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다. 그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 피해에 대해 증언했을 때 쓴 기사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날조 기자’라고 불리게 됐다.
‘날조’라고 하는 근거로 우에무라 기자가 ‘위안부’와 ‘여자정신대’를 오용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1991년 당시 한국에서 ‘위안부’라는 뜻으로 ‘여자정신대’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 아사히신문 외의 다른 일본 매체들도 썼었다. 그런데 ‘위안부’와 ‘여자정신대’를 오용했다고 해도 뭘 날조했다는 것인가.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우에무라 기자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법정 투쟁에 나섰다. 지난 10월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에무라 기자의 법정 투쟁을 중심으로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표적’이 상영됐다. ‘표적’을 찍은 니시지마 신지(西嶋真司) 감독은 부산영화제에서 한국 관객과 대화했다. “일본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은 나이가 많은 편인데 부산영화제에는 젊은 관객들이 많고 질문 내용을 통해 역사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느꼈다”며 반가운 표정을 보였다. 부산영화제 후 니시지마 감독은 ‘표적’으로 제33회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상했다.
니시지마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후쿠오카의 방송국 RKB 마이니치 방송을 그만뒀다. 원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으로 찍기 시작했고 여러 번 기획서를 냈지만 방송 허가를 못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위안부 관련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방송국에 남으려면 우에무라 기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TV 프로그램이 아닌 영화로 만들기 위해 35년 다닌 방송국을 2016년에 퇴사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을 때 이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의 법정 투쟁 과정을 그린 니시지마 신지 감독의 영화 ‘표적’의 장면들.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11/13/a39a88b6-ab1a-468b-83b1-1d3d25f67124.jpg)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을 때 이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의 법정 투쟁 과정을 그린 니시지마 신지 감독의 영화 ‘표적’의 장면들.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
우에무라 기자도 2014년에 아사히신문을 조기퇴직했다. 퇴직 후 교수로 취임하기로 내정됐던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에는 우에무라 기자를 고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 메일과 전화가 쇄도했고 고용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우에무라 기자는 “내 기사가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은 학교 측의 태도에 실망했다”고 한다. 비상근강사로 근무하던 호쿠세이학원대학에도 “우에무라를 그만두게 하라”는 등의 항의 메일과 협박장이 잇따라 날아왔다. 호쿠세이학원대학은 우에무라 기자가 계속 근무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만두게 됐다. 2016년 우에무라 기자는 일본을 떠나 한국 가톨릭대학 초빙교수로 취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한·일 왕래가 어려워진 지금은 일본에서 잡지 ‘주간 금요일’ 사장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니시지마 감독이 이 문제에 대해 열정적인 이유는 우에무라 기자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대해 보도한 1991년에 니시지마 감독도 특파원으로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우에무라 기자가 쓴 기사와 같은 내용을 보도했고 다른 일본 신문사나 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왜 우에무라 기자만 비난을 받는 것인지.”
그 이유는 그가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아사히신문은 비교적 다른 언론사에 비해 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도해왔다. 김학순 할머니는 최초로 피해를 증언하면서 국제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걸 보도한 우에무라 기자가 ‘표적’이 된 것이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보도한 여러 매체의 여러 기자를 비난하면 연대해서 대항했을 텐데 한 매체의 한 기자가 희생양이 됐다. 영화 ‘표적’을 보면서 의도적으로 아사히신문과 우에무라 기자만 노렸다는 것을 느꼈다.
아사히신문 “방송 편집에 정치적 압력”
![영화 ‘표적’의 포스터.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11/13/7e607f34-4e30-4a7b-b890-685bf29114ba.jpg)
영화 ‘표적’의 포스터.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
이렇게 일본 언론은 점점 위안부 관련 보도에 소극적으로 변해 왔다. 나는 아사히신문 기자일 때 주로 문화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위안부 관련 취재를 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만두고 한국에 와서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한 기사를 일본 매체에 썼을 때 역시 댓글이나 SNS에서 공격을 받았다. 이런 다큐도 나왔다 정도의 내용이었는데 반응이 커서 놀랐다.
올해 한국에서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존 마크 램지어 교수가 쓴 위안부 관련 논문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한국에서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걸 보고 당연히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보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거의 안 했다.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 말로는 쓰자고 제안은 했지만 못 썼다고 한다.
나는 2008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는데 그땐 이미 위안부 문제는 다루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고노 담화가 나온 1993년 당시는 일본 언론도 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도했던 걸로 알고 있다. 니시지마 감독한테 언제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는지 물어봤더니 “1997년쯤인 것 같다”고 한다. 1997년은 ‘일본의 전도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이 설립된 해다. 이 모임은 자민당 안의 의원연맹이며 당시 역사 교과서를 ‘반일적’이라고 지적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술을 없애도록 활동했다.
![니시지마 신지 감독.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11/13/5afa8d44-283d-42f1-ba5a-092cdef1b906.jpg)
니시지마 신지 감독. [사진 니시지마 신지, 최우창]
“그것보다 내가 방송국에 있으면서 결정적이라고 느낀 건 2001년 NHK ETV 특집 때였다”고 한다. NHK는 2001년에 방송한 ETV 시리즈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성폭력 문제를 다뤘다. 방송 직전에 내용이 크게 바뀐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프로그램 편집에 대해 정치적 압력이 있었다고 보도한 반면 NHK는 압력은 없었다고 주장해 결국 애매모호하게 됐다”고 한다.
아마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으면 언론인들이 연대해서 정부에 항의하지 않을까 싶지만 니시지마 감독은 “이 일을 계기로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아사히신문이 공격을 받는 것 같다.
우에무라 기자가 제기한 명예훼손 재판은 패소로 끝났다. 니시지마 감독은 “납득이 안 가는 판결이지만 그렇다고 재판소가 ‘날조 기자’라고 인정한 건 절대 아니다. 패소 때문에 또 오해를 받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느 쪽에 정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표적’은 우에무라 기자 한 사람의 피해만 그린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어떻게 위안부 보도에 대한 언론의 자유가 위협받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