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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스페인 언니가 틀어준 '동해물과 백두산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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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14화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부르고스 영토가 끝나는 마을인 카스트로헤리스(Castroheriz)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산 위에 우뚝 솟은 카스트로헤리스 요새는 메세타 평원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신비의 장소를 3km 앞두고 판타지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오래된 건물을 만났다. 지붕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겨우 남은 벽들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어 위태로워 보였다. 당장 무너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가로질러 세운 아치형 문이 그나마 온전했다. 아래를 통과하자니 거인의 사타구니 사이를 걷는 기분이었다.

메세타 평원 굽어보는 카스트로헤리스 요새.

메세타 평원 굽어보는 카스트로헤리스 요새.

머리 위의 아치가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조금 긴장했다.

머리 위의 아치가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조금 긴장했다.

〈산 안톤〉이라고 쓴 푯말 외에는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다. 흉물스러웠지만 남아있는 흔적만으로도 과거에 위용이 대단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소리가 들려 가보니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기웃대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부로’(당나귀)를 외치며 몰려왔다. 10살 정도 된 여자아이 테레사가 당나귀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승마를 배웠다고 했다. 주말을 맞아 부르고스에서 왔는데 마침 점심 식사를 하려던 중이었단다.
“어서 오세요. 함께 들어요. 여기 가스띠야 와인이 잔뜩 있답니다.”
페페라는 이름의 뚱뚱한 사내가 양손에 와인을 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메뉴는 문어와 새우가 들어간 빠에야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쌀로 만든 음식이다. 이런 기회를 지나칠 내가 아니다. 집밥이 그리운 참에 빠에야는 꿩대신 닭이다.

이리 와서 같이 밥 먹어요. 부르고스에서 온 사람들이 불렀다.

이리 와서 같이 밥 먹어요. 부르고스에서 온 사람들이 불렀다.

가스띠야 와인으로 입 축이고.

가스띠야 와인으로 입 축이고.

문어랑 새우가 들어간 빠에야로 배 채우고.

문어랑 새우가 들어간 빠에야로 배 채우고.

“와인은 우리 가스띠야인들에게 자동차 기름과 같다우. 마시지 않으면 제 구실을 못해요. 하하하”
페페가 분위기를 이끌고, 흥 많은 여자 루르데스가 장단을 맞췄다.
“자 마시자고요. 여행을 계속하려면 바로 이 와인을 마셔야 해요. 부릉부릉.”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루르데스는 부르고스대학 도서관장이라고 했다.
“당신이 책을 내면 우리 도서관에도 한 권 소장할게요.”
루르데스는 내가 ‘아름답다’며 볼이 닳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이때 모니아라고 하는 여인이 다가왔다.
“주무시고 가세요. 여긴 무료 알베르게랍니다. 이곳만큼 천장이 아름다운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자리에 끼지 않았으면 후회막심 할 뻔했다. 신부님이 일어나시더니 당나귀에게로 다가왔다.
“하나님 은총이 당나귀와 함께 하길.”
신부님은 당나귀와 나에게 성호를 그으시며 기도해주신 뒤 부르고스로 떠나셨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술고래들만 남았다. 페페와 루스데르 그리고 호르헤 부부와 알베르게 봉사자 마리사였다.
군인 출신이라는 페페가 갑자기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진지한지 웃음이 터졌다. 나에게 한국 군가를 주문하기에 ‘진짜 사나이’를 불렀다. 취한 호르헤가 해롱해롱하며 거수경례를 부쳤다. 제 몸도 못 가눌 정도가 된 루르데스는 계속 내 볼에 키스를 퍼붓고, 페페는 질세라 열병식 흉내를 내며 구령을 외쳤다. 기차 화통 뺨치는 목소리에 허약한 건물이 우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나도 보란 듯이 손으로 기상나팔 만들어 불며 소리쳤다.
“기사아앙~.”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술고래들은 신이 나서 서로를 보며 낄낄댔다.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루르데스가 인터넷에서 애국가를 찾아내 튼 것이다. 호르헤 부부는 엄숙한 얼굴로 가슴에 손을 얹고 예의를 다했다. 페페는 거수경례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언제 불러 보았는지도 모르는 애국가를 이국땅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부르게 되다니. 날이 어두워지자 모두 짐을 챙겼다. 혼자 맨 정신인 호르헤 부인이 운전대를 잡고 메세타평원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적막이 빠르게 찾아왔다. 지붕은 무너지고 사방의 벽만 남은 장소, 두 개의 육중한 철문을 닫자 우리는 천 년 전 수도사처럼 세상과 멀어졌다.
“이곳은 로마 시대에 지어졌어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고 알베르게였답니다. 순례를 하다가 병이 들거나 다친 사람들만 재워주는 그런 알베르게요. 지금은 거의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있는 거죠.”

군인이었던 페페 아저씨가 스페인 군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군인이었던 페페 아저씨가 스페인 군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호택이 아부지가 질쏘냐. 한국 군가 '진짜 사나이'를 화끈하게 불러주었다.

호택이 아부지가 질쏘냐. 한국 군가 '진짜 사나이'를 화끈하게 불러주었다.

급기야 루르데스가 핸드폰에서 애국가를 찾아서 틀고, 호르헤 부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차렷. 코끝이 찡했다.

급기야 루르데스가 핸드폰에서 애국가를 찾아서 틀고, 호르헤 부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차렷. 코끝이 찡했다.

조금 남은 노을마저 사라지자 폐허는 더욱 음산해보였다.
“이곳에는 전기도 없고 따듯한 물도 없습니다.”
“와이파이도 없나요?”
“물론이지요. 데이터도 꺼보세요. 진정한 순례자가 되려면 말이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모니아가 촛불을 켜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촛불이 허락하는 만큼의 세상만 볼 수 있어요. 이 정도도 넘치는 거지만요.”
그나마도 10시에 소등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일 아침식사는 8시입니다. 빵과 커피가 나올 거예요. 오늘 밤 좋은 경험하시길. 이곳의 진짜 모습은 밤에 있거든요.”
모니아도 떠나고 이 작은 중세 세상에 온전히 우리만 남았다.
새벽에 잠이 깼다. 지나친 고요도 큰 소음만큼 잠을 방해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와~ 세상에.”
천 년 전, 순례자들이 보았을 그 하늘과 마주했다. 별똥별 하나가 긴 꼬리를 남기며 벌판 어딘가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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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 벽에 서있는 장대. 빗자루는 잠자리 청결을 위한 청소도구, 조롱박 물병은 메세타를 건너는 생명줄, 두 개의 조가비와 십자가는 야고보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자 표시, 끝에 달린 창은 순례길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무기를 뜻한다. 알베르게는 부상당한 순례자들에게 문이 열려있었다.

숙소 벽에 서있는 장대. 빗자루는 잠자리 청결을 위한 청소도구, 조롱박 물병은 메세타를 건너는 생명줄, 두 개의 조가비와 십자가는 야고보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자 표시, 끝에 달린 창은 순례길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무기를 뜻한다. 알베르게는 부상당한 순례자들에게 문이 열려있었다.

잠 잘 준비를 하는 호택이.

잠 잘 준비를 하는 호택이.

동훈이 눈도 살짝 맛이 갔다.

동훈이 눈도 살짝 맛이 갔다.

고단한 하루가 지났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고단한 하루가 지났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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