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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청량산 아홉구비 절경 노래한 ‘청량구곡가’ 최초 공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3)

조선시대 선비들은 산이나 계곡 등 자연을 찾아 심신을 수양하는 시간을 마련하곤 했다. 아홉 굽이 절경을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구곡(九曲) 문화다. 우리나라는 전국 160여 곳에 구곡이 설정되어 있다. 구곡마다 그곳을 즐긴 선비의 시가 있다. 현재까지 구곡을 노래한 시는 1000수가 넘는다.

경북 봉화군에는 청량산이 있다. 청량산은 규모는 작지만 풍광이 뛰어나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어진다. 청량산과 관련 있는 첫 번째 인물은 퇴계 이황 선생이다. 퇴계는 14세에 청량산을 처음 찾은 이후 틈만 나면 들렀고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청량산에서 내려온 제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퇴계는 동료·제자들과 수시로 청량산을 찾아 시를 짓고 강학했다. 청량산을 소재로 한 시만 수십 편을 남겼다.

청량산 입구에 세워진 ‘청량지문’. 김생의 글씨를 집자했다. [사진 송의호]

청량산 입구에 세워진 ‘청량지문’. 김생의 글씨를 집자했다. [사진 송의호]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와 후학들은 청량산 순례를 시작한다. 그때부터 청량산은 퇴계의 자취를 찾는 성지가 되다시피 했다. 순례를 마치면 선비들은 그 감회를 글로 남겼다. 이른바 유산기(遊山記)다. 조선시대 선비·사대부의 문집에 나오는 유산기는 금강산이 가장 많다. 다음은 지리산이고 세 번째는 청량산이다. 청량산 유산기는 100여 편에 이른다.

지난 10월 28일 한국국학진흥원이 마련한 역사인물 학술대회에서 청량산 유산기 하나가 새로 발표되었다. 이규필 경북대 교수는 “이 유산기엔 청량산에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가가 지어진 것이 주목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청량구곡이 등장하고 경치를 노래한 청량구곡가가 지어졌다는 것이다.

청량구곡은 일제강점기에 파리장서 운동을 펼치다가 옥고를 치른 유천(柳川) 이만규(李晩煃·1845~1920)가 설정했다. 유천은 퇴계의 11대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부교리를 지낸 인물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속죄하는 마음으로 24일 단식 뒤 자정 순국한 의병장 향산 이만도의 동생이기도 하다.

청량구곡을 설정한 이만규가 대과인 문과에 2위로 급제했음을 적은 교지. 홍패로 불린다. [사진 송의호]

청량구곡을 설정한 이만규가 대과인 문과에 2위로 급제했음을 적은 교지. 홍패로 불린다. [사진 송의호]

유천은 성주 벽진의 벗 등 8명과 함께 청량산에 오른다. 여덟 사람은 고산정을 바라보며 낙동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침내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에 도착하고 연대암(지금의 청량사)과 총명수, 안중사 등을 찾는다. 오산당은 청량정사에 딸린 초당으로 퇴계의 오가산에서 따 온 이름이다. 유산기의 한 대목은 이렇다.

“경일봉 머리 위로 달이 돋아 맑은 빛이 온 방에 가득하고 바람 소리가 골짝에서 일어나니, 연화대와 금탑봉이 빛나 마치 보석굴에 들어온 듯하였다. 내가 매우 즐거워 자익(子翼)과 천천히 거닐며 밖으로 나와 일행을 불러 깨우며 말하였다. ‘이런 밤에 어찌 잠이 올 수 있는가?’”

경일봉 위로 달이 돋은 청량산의 아름다운 밤 풍경이 그려진다.

유천은 이어 유산기에 청량구곡을 설정한다. 1곡은 장인봉 김생굴, 2곡은 연화봉 연화암, 3곡은 곡구(谷口), 4곡은 석문, 5곡은 옥소봉 풍혈대, 6곡은 문수암, 7곡은 만월암, 8곡은 탁필봉 자소봉, 9곡은 독수동(禿秀洞)이다. 그리고 그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 시를 본떠 청량의 구곡을 노래했다.

청량산에는 퇴계 이황의 시판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사진 송의호]

청량산에는 퇴계 이황의 시판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사진 송의호]

이규필 교수는 “유천은 도산에서 출발해 고산정을 거쳐 오산당에 이르도록 유산 경로를 정형화하고 청량구곡을 설정해 청량산 유람을 하나의 순례길로 만들고자 한 것 같다”고 정리했다. 그동안은 유천의 조부인 이가순이 설정한 도산구곡만 알려져 있었다. 도산구곡은 제1곡 운암-제2곡 월천-제3곡 오담-제4곡 분천-제5곡 탁영담-제6곡 천사-제7곡 단사-제8곡 고산-제9곡 청량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새로 드러난 청량구곡을 찾아 산행을 하는 것도 청량산을 완상하는 또 다른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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