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우길⑧ 소백산자락길
소백산 동쪽 기슭, 첩첩산중의 오지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길의 이름은 소백산자락길 9자락길과 10자락길. 심심산골에 희미하게 난 숲길과 띄엄띄엄 놓인 산촌을 잇는 마을길이다. 굳이 이맘때 두메산골을 찾아 걸은 건, 지금이 11월이어서다. 늦가을의 정취도 정취려니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이어서다.
소백산자락길 동쪽 자락을 걷는 것은, 번다한 세상으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지는 일이었다. 난을 피해 숨어들었다는 터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좇는 산사까지 이틀에 걸쳐 걸었다. 긴 걸음 마친 뒤 산사 중턱에서 저녁놀을 내다봤다. 때맞춰 내려앉은 단풍만큼 석양이 고왔다.
소백산자락길
소백산은 큰 산이다. 이름은 태백산이 더 크지만, 산은 소백산이 훨씬 더 크다. 산이 더 큰 만큼, 고개도 더 많고 길도 더 많다. 마루금 따라 이어진 소백산 주 탐방로가 백두대간과 포개지고, 산 서쪽에는 명승으로 지정된 죽령 옛길이, 산 동쪽에는 고치령길·마구령길 같은 험한 고갯길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을 비롯한 조선 사대부가 지었다는 죽계구곡(竹溪九曲)도 실은 소수서원에서 계곡을 거슬러 소백산에 드는 길이다.
걷기여행길도 있다. 소백산을 크게 한 바퀴 두르는 소백산자락길이다. 2009년 영주문화연구회가 조성을 시작해 2012년 마무리했다. 전체 길이는 143㎞에 이른다. 12개 코스로 나뉘는데, 소백산자락길은 각 코스를 ‘자락’이라 부른다. 이번에 걸은 두 자락길은 소백산 동쪽 자락에 걸친다. 9자락길이 7.2㎞, 10자락길이 7㎞ 길이다.
소백산자락길이 여느 국립공원 둘레길과 다른 점이 있다.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 국립공원을 수시로 넘나든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국립공원 안쪽으로 안 들어가고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 국립공원 바깥 마을을 외면하는데, 소백산자락길은 국립공원의 경계를 허문다. 영주문화연구회 배용호(70) 이사는 “길에 관할이 어디 있고 구역이 왜 있느냐”고 말했다.
오지 마을을 찾아가다 - 9자락길
9자락길은 이른바 ‘재 너머 마을’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재는 마구령(820m)을 이른다. 소백산 남쪽 마을, 그러니까 지금의 경북 영주에서 마구령 너머는 다른 세상이었다. 백두대간 북쪽이니 강원도나 충청도에 속해야 하나 이 마을은 경상도에 속한다. 행정구역이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다. 남대리 맞은편 태백산 줄기의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남대리와 의풍리(충북 단양군)를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대리는 경상과 강원과 충청이 만나고 헤어지는 땅이다.
남대리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속한다. 태백산(1567m)과 소백산(1440m) 사이 두메를 양백지간이라 하니, 대표적인 내륙 산간지역이다. 『정감록』이 전하는 십승지(十勝地)에도 남대리 일대가 나온다. 십승지는 전란과 질병을 피해 사람이 살 수 있는 터를 이른다. 남대리는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는 오지 중의 오지다. 이 오지에도 사람이 살았다. 사람이 살아서 길도 있다.
9자락길은 옛날 보부상이 다녔던 길을 되짚는다. 남대리 주막거리에서 시작한 길이 소백산 동쪽 끝자락을 따라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옛 뒤뜰 장터까지 이어진다. 마을로 내려올 때까지 깊은 숲속을 걸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나뭇잎 사이로 금모래처럼 환한 가을 햇살이 내려왔다. 1시간쯤 걸으니 핸드폰이 끊겼고, 인적도 끊겼다. 발아래 낙엽 밟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만 적막한 숲을 울렸다. 늦은목이재(786m)는 이름처럼 경사가 늦지 않았다. 백두대간은 백두대간이었다. 늦은목이재에서 내려오자 핸드폰 안테나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부석사 가는 길 - 10자락길
뒤뜰 장터에서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뒤뜰장이 열렸던 시절, 이 산골 마을도 흥청거렸다. 경북 울진에서 시작한 십이령길이 뒤뜰장까지 이어졌고, 보부상들은 뒤뜰장에서 다시 늦은목이재를 넘어 의풍까지 갔다. 옛날 이 길을 ‘염길’이라 했단다. 의풍에서 넘어온 소금이 영남 지방으로 퍼져 나가서였다. 영남에선 대신 고추·담배 따위와 건어물을 재 너머로 올려 보냈다.
10자락길 주변은 온통 사과밭이었다. 마침 빨갛게 익은 사과가 사방에서 반짝였다. 현재 전국에서 사과가 제일 많이 나는 고장이 영주다. 아직은 봉화 땅을 걷고 있었지만, 사과가 지천이었다. 10자락길은 영락없는 산골 마을길이었다. 행인은 없었고, 밭에서 일하는 농민만 이따금 눈에 띄었다. 사과밭을 지난 길은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예의 그 소백산 숲길이 이어졌다. 숲에서 나오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부석사에 도착한 것이다. 여태 걸어온 속세의 길보다 더 번잡한 불국토라니. 부석사의 인기를 새삼 실감했다.
부석사는 가을에 더 예쁜 절이다. 부석사가 터를 잡은 봉황산(819m) 자락의 단풍도 화려하거니와 부석사 아래 늘어선 은행나무도 가을이면 눈부시게 빛난다. 부석사는 해 질 녘에 더 고운 절이다. 저녁 해가 고스란히 부석사 경내에 떨어진다. 무량수전 왼쪽 언덕은 이미 여남은 명이 모여 있었다. 여기에 올라서면 절집 지붕들 너머로 떨어지는 저녁해가 가장 보인다. 다른 관광객과 섞여 부석사 저녁놀을 지켜봤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갔고,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