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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돌아온 ‘빨래’ 설레는 ‘난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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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해도 손해”라고 하면서도 눈빛엔 설렌 기운이 가득했다. 위드 코로나에 맞춰 공연 재개를 결정한 ‘난타’ 제작자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감독과 ‘빨래’ 제작자 최세연 씨에이치수박 대표. 두 사람 모두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며 긴 공백기를 돌아봤다.

서울 명동 난타 전용관은 다음달 2일부터 문을 연다. 지난해 3월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닫았던 문이다. 지난 3일 만난 송 예술감독은 “석 달만 버텨보자, 6개월이면 되겠지 하면서 21개월 동안 빈 극장 임대료만 계속 나갔다”고 했다. 1997년 초연한 ‘난타’는 한류 공연의 원조로 꼽힌다. 한때 명동뿐 아니라 서울 충정로와 홍대앞, 제주와 태국 등에서 상설 공연장을 운영하며 1400만 명 넘는 관객을 만났다. 명동 전용관에서만 하루 네 차례씩 공연하는 시절도 있었다.

위드 코로나로 공연 재개
배달 알바 배우들 돌아와
“몸이 기억” 연습현장 눈물
무대 지킬 관객 숙제는…

지난 4일 뮤지컬 ‘빨래’ 배우들의 드레스리허설 모습. 코로나19로 인해 1년 만에 무대에 서게 된 배우들은 리허설이 끝난 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진 씨에이치수박]

지난 4일 뮤지컬 ‘빨래’ 배우들의 드레스리허설 모습. 코로나19로 인해 1년 만에 무대에 서게 된 배우들은 리허설이 끝난 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진 씨에이치수박]

다시 시작하는 공연 일정은 단출하다. 목∼일요일 주 4일 문을 열고 공연은 하루 한 차례씩, 토요일만 두 차례 진행한다. 8개 팀으로 나눠 무대에 섰던 배우들도 3개 팀, 총 15명으로 꾸려졌다.

“주 5회 공연으론 손해다. 하지만 이러다 ‘난타’가 잊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주 관객층이었던 외국인 관광객이 없는 상황이지만, 아직 ‘난타’를 보지 않은 젊은 관객과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을 상대로 마케팅할 계획이다.”(송승환)

공연이 쉬는 동안 배우들은 대리운전과 식당 서빙 등 생업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배달 일거리가 가장 많았다. 강남역에서 길을 묻고 답하던 두 라이더가 헬멧을 벗고 보니 둘 다 ‘난타’ 배우였다던 에피소드도 있다.

2000년부터 20년간 ‘난타’에 출연한 배우 설호열은 공연 중단 이후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했다. 주 5일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 30분까지, 그리고 또 오전 10시 30분부터 4시간 동안 택배 분류 작업을 했다.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그는 다시 공연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지만, 그 사이 스터디 카페와 떡볶이 가게 등을 차린 동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달 2일 공연을 재개하는 ‘난타’. 맨 왼쪽은 설호열 배우다. [사진 PMC프러덕션]

다음달 2일 공연을 재개하는 ‘난타’. 맨 왼쪽은 설호열 배우다. [사진 PMC프러덕션]

‘난타’ 배우에겐 칼과 불을 쓰는 현란한 요리 기술이 필수다. 한동안 쉰 여파가 걱정될 법하지만, 설호열 배우는 “몸이 기억한다”고 자신했다.

대학로 오픈런 뮤지컬의 대명사 ‘빨래’는 지난 5일부터 유니플렉스2관에서 공연을 재개했다. 지난해 11월 중단한 이후 꼭 1년 만이다. 첫 사흘 공연은 매진됐고, 이달 말까지의 티켓도 85% 넘게 팔렸다. 10명, 20명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했던 지난해 가을에 비하면 놀라운 흥행이다.

9일 서울 명륜동 씨에이치수박 사무실에서 만난 최 대표는 지난 4일 드레스 리허설이 끝난 뒤 배우들과 함께 눈물을 흘린 이야기를 꺼냈다.

“불안한 마음으로 1년을 버틴 거다. ‘이제 진짜 공연하는구나’란 감격이 컸다. ‘수고했어’란 일상적인 인사에 울음이 터졌다.”(최세연)

그동안 ‘빨래’가 겪은 일은 ‘난타’와 거의 똑같다. 사무실 직원들은 권고사직으로 떠나야 했고, 배우들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부분 배달 일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공연계가 입은 타격은 이제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흔하고 뻔한 이야기가 됐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여전히 진행 중인 충격이다. 두 제작자도 “2년 동안 매출 손실이 300억원이다. 은행 대출로 버티고 있다”(송), “2013년 법인을 만든 뒤 모아둔 돈을 거의 다 까먹었다”(최)라고 했다.

정부 대책도 아쉬웠다. 송 예술감독은 “공연은 손실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배우들은 30만원, 50만원씩 소액 지원받은 게 전부”라고 전했다. 최 대표는 “백신패스가 있으면 이어앉기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확인 작업을 하려면 직원을 두 명 더 뽑아야 한다”면서 그냥 띄어앉기를 적용해 회당 210석 정도만 채우기로 결정한 이유를 털어놨다.

분통이 터질 만한데도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배우 송승환’으로도 다시 무대에 서는 송 예술감독은 더욱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지난해 12월 공연기간 중 예고 없이 막을 내린 연극 ‘더 드레서’의 주인공으로 오는 16일부터 다시 관객을 만난다. 공연 제작자들의 이런 계산 없는 열정은 ‘난타’ ‘빨래’만의 사례가 아니다. 무대의 매력에 스스로 빠져 어떻게든 공연을 이어가려한 이들의 집념이 우리 대중문화의 든든한 뿌리가 됐다. ‘난타’를 거쳐 간 류승룡·김원해, ‘빨래’ 출신 이정은·이봉련·정문성·곽선영 등의 활약만 봐도 그렇다. 그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 K컬처 열풍에 으쓱해진 우리 모두에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