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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의 빈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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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모란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모란 사회2팀 기자

최모란 사회2팀 기자

취재하던 중 우연히 전직 경기도 공공기관장 A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 잘한다”는 말을 듣던 그가 한참 남은 임기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낸 배경에 은근한 사퇴 압력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A씨는 “그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거듭된 설득에 큰 한숨을 내쉬더니 “하소연하고 털어놓는다고 (나에게) 도움될 것 같지 않다”며 한사코 답변을 거부했다.

지역 정가에선 A씨의 퇴임 이유를 선거 때문이라고 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남경필 전 지사를 누르고 경기지사에 당선됐다. 새로운 단체장이 취임하면 전임자가 임명한 기관장은 관례처럼 사직서를 낸다.

A씨 등 일부 기관장은 “임기를 채우겠다”며 남았다. 오래가지 못했다. 대대적인 공공기관 감사 등에 손을 들었다. 이들이 나간 자리는 이 후보와 관련된 인물로 메워졌다. 한 산하기관 노조 관계자는 “산하 기관장의 자격이 언제부터 ‘능력’이 아닌 ‘인연’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가 지난달 25일 경기도청에서 비대면 방식의 화상 퇴임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 경기도]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가 지난달 25일 경기도청에서 비대면 방식의 화상 퇴임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 경기도]

인연 인사의 부작용은 기관장들이 도민이 아닌 단체장에 충성한다는 거다. 현재 경기도 공공기관 28곳 중 7곳에 ‘사장·원장’이 없다. 기관장 4명이 이 후보 대선 캠프에 합류했거나 합류할 예정이다. 공공기관장의 임기는 3년. 캠프로 간 이들 중 임기를 꽉 채운 사람은 1명뿐이다. 후임 인선을 준비한 기관장은 아무도 없었다. 남은 공공기관장 중 6~8명도 대선 일정에 맞춰 이 후보 캠프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경기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단체장이 출마하면 기관장들이 따라서 사퇴한다. 논란이 제기되면 각 지자체는 “후임자를 빨리 찾겠다”고 해명한다. 적임자를 찾았다고 해도 당장 내년 6월 지방선거가 걸림돌이다. 새 단체장 취임 후 A씨처럼 은근한 사퇴 압력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경기도의회 행정감사에서 오병권 경기지사 권한대행이 “정상적인 인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도 “지방선거 이후나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낙하산’ 비난에 지자체들은 “공정한 인사를 하겠다”며 인사청문회를 도입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부적격’ 판단을 내려도 단체장이 임명하면 그만이다. 단체장의 결정이 기관장의 운명은 물론, 사업까지 좌지우지하면서 공공기관은 맹목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다. “사장이 꼭 필요하냐”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기관장 임명 보도자료를 찾아봤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적임(適任)자’다. ‘어떤 임무나 일에 알맞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단체장을 따라 사직서를 쓰는 기관장들을 보고 있자니 도민을 위해 뽑았다는 적임자가, 직무를 버린 ‘배임(背任)자’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