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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건희 기증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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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빌바오 효과’라는 표현이 있다. 쇠락한 도시에 대표 건축물(랜드마크)이 들어서며 되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스페인의 북부 소도시 빌바오(Bilbao)에서 따왔다. 북대서양으로 흐르는 네르비온 강을 끼고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원래 제철·조선업이 융성했던 부유한 지역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 구겐하임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세계인들이 앞다퉈 찾는 관광명소로 거듭났다.

지난 7월 한국에서도 빌바오 효과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 점을 전시하기 위한 ‘이건희 기증관(가칭)’ 유치를 두고서다. 부산과 대구, 경남 등 여러 지자체가 이 회장과의 인연을 이유로 유치에 뛰어들었다. 이때 주요 이유로 앞세운 것이 바로 빌바오 효과였다. 문화예술 인프라가 수도권에 몰려있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반면 미술계는 접근성을 고려할 때 지역보다 서울에 기증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빌바오 효과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다. 이 회장이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 중 일부는 고갱·샤갈의 그림이나 피카소의 도예작품 등을 포함하지만, 대다수는 관광객보다 연구자를 위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작품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니 기증관에 관광객이 몰려드는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도 결국 이 의견에 손을 들어줬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는 지난 10일 종로구 송현동에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지난 7월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부지나 송현동 가운데 한 곳에 짓겠다고 발표한 것의 후속 조치다. 이건희 기증관은 송현동 부지 내에 대지면적 9787㎡ 규모로 조성될 예정이며, 내년 하반기 국제설계 공모절차에 돌입한다. 설계·공사를 거쳐 2027년 완공·개관하는 것이 목표다.

서울에 건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까. 이건희 기증관 하나로 지역경제가 확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인구감소와 지역경제 둔화로 지방소멸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결정이 지역민의 허탈함과 박탈감을 키운 것은 분명하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작품도 중요하지만, 유치전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