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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 없는 책? 아이 보여주다 부모도 배우는 ‘파도야 놀자’[오밥뉴스]

중앙일보

입력 2021.11.10 06:00

업데이트 2022.03.02 15:27

ㆍ 한 줄 평 : 듣는 아이뿐 아니라 읽어주는 이의 창의력까지 커지는 놀라운 책!

ㆍ 함께 읽어보면 좋을 이수지의 다른 책
『거울 속으로』 어느 쪽이 진짜 아이고, 어느 쪽이 거울에 비친 아이일까?
『그림자 놀이』 그림자로 만든 환상의 세계!

『토끼들의 밤』 토끼들의 유쾌한 아이스크림 탈취 사건일까, 섬뜩한 복수극일까?

ㆍ 추천 연령 : 글씨가 없으니 부담없이 0세부터,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5~6세까지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추천 연령은 서사의 구조나 주제 등을 고려하여 제안하는 참고 사항일 뿐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2016년이었습니다. 연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책을 펼쳐보고 느꼈던 당황스러운 감정이 오래도록 또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왜 당황했느냐고요? 이 책엔 글자가 전혀 없거든요. 도대체 어떻게 읽어줘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 제 사정을 아는지 아이는 이 책을 거의 매일 들고 왔습니다. 읽을 때마다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그림책의 글자가 어찌나 소중하게 느껴지던지요. 유난히 피곤한 어느 날 영혼 없이 글자만 읽을 수 있는 자유를 이 책은 전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저도 꾀를 냈죠. 늘 읽어주던 전지적 작가 시점을 버리고 아이의 시점에서도 읽어주고, 갈매기 시점에서도 읽어주기 시작했거든요.

그림책 리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 책은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아이뿐 아니라 읽어주는 어른의 창의력도 키워주는 책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책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이 책은 '경계'에 대한 책이었어요.

아이가 선 모래사장과 바다,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아이가 선 모래사장과 바다,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눈치채셨나요? 아이가 왼쪽 페이지(모래사장)에서 오른쪽 페이지(바다)로 넘어가는 순간이 좀 이상하다는 걸요(이미지 가운데가 책의 제본선입니다). 아이가 왼손을 오른쪽 페이지로 넘겼는데, 정작 오른쪽 페이지엔 손이 없죠? 갈매기도 마찬가지예요. 오른쪽 페이지로 얼굴이 넘어간 갈매기는 왼쪽 페이지에 있어야 할 몸통이 없고, 왼쪽 페이지에 몸통이 남아있는 갈매기는 오른쪽 페이지에 얼굴이 없습니다.

아이의 몸이 거의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왔어요. 그런데 아직 안 넘어온 다리랑 팔은 왼쪽 페이지에 더 이상 없네요. 좀 더 앞으로 가볼까요?

아이는 바다(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기 전 모래사장(왼쪽 페이지)에 앉아 바다를 탐색합니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걸 바라보죠. 그런데 파도는 절대 오른쪽 페이지를 넘어오지 않습니다. 그걸 지켜보던 아이가 마침내 손을 내밀어 보더니 몸까지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이고요.

책 가운데 제본선을 중심으로 2개의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가 선 모래사장, 그리고 아직 가지 않은 바다.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와 낯설고 새로운 세계. 아이는 살아가며 계속해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겁니다. 새롭고 낯선 세계로 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무섭기도 하고요. 그건 어른인 우리도 마찬가지인 걸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가도 아무 일(그러니까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요. 아니, 막상 해보면 오히려 재밌는 경우가 더 많죠. 얻는 것도 생기고 말입니다. 바다를 마주했던 바로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요.

아이가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아이가 신나 보이네요.

아이가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아이가 신나 보이네요.

『파도야 놀자』는 선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선을 넘는 것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죠. 주저하게 되고요.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한 번 넘고 나면 그 선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한계는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한계가 아닌 게 되는 법이죠.

파도와 한바탕 놀고 난 뒤 모래사장과 바다를 나누던 경계가 사라집니다. 아이는 파도에 쓸려 온 조개 껍데기를 보라며 엄마를 부르고요.

파도와 한바탕 놀고 난 뒤 모래사장과 바다를 나누던 경계가 사라집니다. 아이는 파도에 쓸려 온 조개 껍데기를 보라며 엄마를 부르고요.

사실 모르고 있던 게 아닙니다. 다만 자주 잊을 뿐이죠. 아이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정작 우리는 그러지 못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파도야 놀자』는 이수지 작가의 경계 삼부작 중 하나입니다. 제본선(경계)까지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끌어안은 또 다른 책은 『거울 속으로』와 『그림자놀이』입니다. 이 세 권의 책을 쌓으면 정확하게 겹쳐집니다. 같은 사이즈죠. 하지만 책을 넘기는 제본선의 위치가 다 제각각입니다. 『파도야 놀자』는 짧은 부분에 제본선이 있는 가로가 긴 책입니다. 『거울 속으로』와 『그림자놀이』는 긴 부분에 제본선이 있는 세로가 긴 책입니다. 이 두 책의 차이는 넘기는 방식입니다. 『거울 속으로』는 옆으로 넘기는 책이고, 『그림자놀이』는 위로 넘기는 책이죠.

이수지 작가의 경계 3부작으로 불리는 그림책

이수지 작가의 경계 3부작으로 불리는 그림책

이수지 작가는 그림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말 그대로 ‘그림책’에 있어선 일가견이 있습니다. 텍스트가 없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도 무궁무진하고요. 저는 『파도야 놀자』를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경계로 읽었지만, 다른 사람은 또 다른 해석을 내놓을 겁니다. 『거울 속으로』와 『그림자놀이』 안의 경계는 무엇인지, 오늘 아이와 함께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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