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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수 터진 뒤에도…정의용, 왕이 만나 '요'자도 안 꺼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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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사진 외교부

지난달 29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사진 외교부

중국발 ‘요소 충격파’가 몰아닥치던 지난달 29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만났다. 주요 20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ㆍ중 외교장관 회담 뒤 외교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의 첫머리는 ‘종전선언’이었다. 이밖에 양국 간 협력 방안도 논의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논의한 협력 방안에 요소 수급 문제는 없었다. 30여분 간의 회담에서 정 장관은 왕 위원에게 요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요소수 대란은 경제와 안보를 분리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특히 요소수 부족은 물류뿐 아니라 노선버스 등 대중교통, 환경미화 차량부터 어린이집 차량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쳐 국민의 ‘말초신경’을 마비시키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일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미 피해는 현실화하는 조짐이다. 적기 대응을 놓친 정부의 ‘3무(無)’ 정책 실패를 짚어봤다.

8일 오전 경기도 안양시 한 레미콘 공장에 요소수 부족으로 운행하지 못하는 차량들이 주차돼 있다.  공장 관계자는 "현재 요소수 가격을 10배로 올랐고 이또한 구하기가 어려워 해외 수입을 직접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며 이번주 이후면 대부분의 차량이 운행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8일 오전 경기도 안양시 한 레미콘 공장에 요소수 부족으로 운행하지 못하는 차량들이 주차돼 있다. 공장 관계자는 "현재 요소수 가격을 10배로 올랐고 이또한 구하기가 어려워 해외 수입을 직접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며 이번주 이후면 대부분의 차량이 운행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①공격적 문제 제기 없었다

우선 문제를 유발한 당사국인 중국과 외교장관 회담을 하며 요소 문제를 꺼내지도 않은 것은 정부의 인식이 안일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다자회의 중 짧게 이뤄진 회담에서 양국 간 모든 현안을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택과 집중’이란 측면에서 요소 문제의 우선순위는 뒤로 밀려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국내에서 이런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이어지는데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를 의제로조차 다루지 않은 것은 너무나 큰 외교적 빈틈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재한 ‘공급망 회복력 관련 글로벌 정상회의’(10월 31일)는 요소 문제를 제기할 좋은 기회였는데, 역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글로벌 공급망 정상회의가 열렸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글로벌 공급망 정상회의가 열렸다. 연합뉴스

사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경쟁 가운데 공급망 문제에 집중하는 배경이 바로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요소 대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중국이 국제적 규범을 무시하고 자국 위주의 수출ㆍ입 조치로 ‘공급망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요소에 대해 일방적으로 수출 전 검사를 의무화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공급망 정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아 바로 다음 순서로 발언한 문 대통령은 요소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 촘촘한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고 공정한 무역질서를 복원해야 한다”는 원론적 발언만 했을 뿐이다. 주요국 정상들에 요소 확보 협력을 요청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술 더 떠 중국에서는 이번 사태로 세계 공급망 체인에서 중국의 우월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계열 매체인 런민즈쉰(人民資訊)은 8일 “이번 공급 위기를 통해 유럽, 한국, 미국 모두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이 가진 중요 지위를 더욱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썼다.

저자세라는 비판도 감수하며 한ㆍ중 관계에 큰 공을 들여온 문재인 정부이기에 국민적 실망감이 더 큰 측면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간 투입했던 ‘대중 외교적 자본’을 회수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공급망 회복력 관련 글로벌 정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공급망 회복력 관련 글로벌 정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물론 중국의 조치는 모든 나라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예외를 만들어내는 게 외교적 역량이다. 일례로 재정이 어려운 개발도상국에만 백신을 지원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21일 한ㆍ미 정상회담 뒤 안보를 명분으로 얀센 백신 100만 회분을 한국에 무상으로 보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정부의 지속적 요청에도 이미 가계약한 요소 1만 8000t조차 꼭 쥔 채 놓지 않고 있다.

김진호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이 정말로 한ㆍ중 관계를 우호관계로 여긴다면 국내적 상황이 어려워도 특히 큰 어려움을 겪는 한국에는 요소를 어느 정도 먼저 제공해주는 게 맞고, 우리 외교 당국도 공산당 등 중국의 핵심 인맥에 접근해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하지만 현 상황은 두 가지 모두 잘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②‘사드 보복’ 교훈 없었다

정부는 지난 7일 대외경제안보 전략회의에서 장기적 대책으로 “특정국에 대한 생산 의존 비중이 높은 품목을 조사해 수급 불안 가능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7년 3월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빠져 텅 빈 제주 롯데면세점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 2017년 3월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빠져 텅 빈 제주 롯데면세점의 모습. 연합뉴스

하지만 이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 체계 배치 뒤 중국이 한국에 각종 보복을 가하던 4~5년 전에 이미 이뤄졌어야 하는 조치다. 이번 요소 사태는 당시와 배경은 다르지만, 높은 대중 의존도와 중국의 불가측성으로 인해 국민의 실질적 피해가 발생한다는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국제법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한국에 고통을 줄 수 있는 분야들을 골라 보복했다. 한국 단체관광 제한이 대표적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6년 7월 사드 배치 뒤 2019년 4월까지 중국인 관광객은 65%(898만 9097명) 감소했고, 이로 인한 손실은 약 21조원으로 집계됐다.

정부 역시 이에 맞서 대중 의존도가 높은 품목과 분야를 파악해 진작에 수ㆍ출입선 다변화 등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나섰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중국과 10ㆍ31 합의로 “사드 문제는 봉인됐다”(청와대 관계자)고 선언한 뒤 사드 보복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려온 측면이 있다.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 산업현장인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내 분석측정센터를 방문해 연구원으로부터 포토레지스트 협력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스1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 산업현장인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내 분석측정센터를 방문해 연구원으로부터 포토레지스트 협력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스1

이는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당시 문 대통령까지 즉각 나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2019년 8월 국무회의 발언)며 이른바 ‘소ㆍ부ㆍ장(소재ㆍ부품ㆍ장비)’ 자립도를 높이기 위한 전폭적 지원에 나선 것과도 비교된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은 “결과적으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두 차례나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새가 됐다”며 “게다가 중ㆍ일에 각기 다르게 대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경제 안보적 대응마저 한ㆍ일관계 맥락에서 취한 것처럼 보일 여지를 남겼다”고 우려했다.

③‘위험신호’ 읽을 초병 없었다

초기에 위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중국의 요소 수출 전 검사 의무화 조치는 지난달 15일 나왔는데, 청와대의 대응 태스크포스(TF)는 21일만인 지난 5일에야 꾸려졌다.

또 한국비료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t당 274달러였던 국제 요소 가격은 이미 올 6월 431달러로 급등하며 이상 조짐을 보였다. 국내 무기질 비료 업계에서부터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휴일인 지난 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정보 제공 요청과 요소수 품귀 사태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휴일인 지난 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정보 제공 요청과 요소수 품귀 사태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도 나비효과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이상 징후를 읽을 전문성과 감각을 지닌 ‘초병’이 없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대중 외교의 최전선인 주중 한국 대사관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경제부처 파견 인력 중심으로 구성된 대사관 경제부에서 중국 정부의 동향과 국내 업계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파악해 정부 차원의 예측과 대책 마련이 이뤄져야 했기 때문이다.

장하성 주중 대사 임명 때부터 언어 능력이나 경력 등에서 대중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나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중국 특유의 폐쇄성 등을 고려하면 주중 공관에는 전문성과 함께 중국에 대한 현실적 이해력을 갖춘 인력을 배치해야 하는데, 이번에 예견됐던 사태를 현지에서 조기에 감지하거나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이런 인력들이 부족하다는 뜻일 수 있다”며 “특히 중국 의존도가 80%를 넘는 품목이 1850여개에 이른다고 하니, 향후 조기 경보 시스템 확립 차원에서 각 부처별 전문 인력을 통한 대응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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