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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두달 잠복의 배신…만취女 성폭행범 덮쳤는데 딴사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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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이미지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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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 사람이 분명히 맞는데….”
지난 5월 중순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한 주택. 두 달간 뒤쫓던 성폭행 용의자를 급습한 경찰은 정작 범인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손에는 법원에서 발부받은 체포영장이 있었다. 체포만 하면 되는 순간, 범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사건추적]

체포영장에 기재된 이름이 범인의 이름과 달랐다. 얼굴은 경찰관이 파악한 범인이 맞는데, 전혀 엉뚱한 사람으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상황이었다. 지난달 28일 서울북부지검이 준강간 혐의로 기소한 50대 남성 양모씨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범인 얼굴 아는데 이름 몰라 잠복·미행

사건은 8개월 전인 지난 3월 발생했다. 양씨는 서울 동대문구의 한 지하철 역사 내에서 술에 취해 있던 30대 여성 A씨를 택시에 태워 모텔로 데려갔다. 범행 직후 양씨는 홀연히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A씨가 신고하면서 서울 용산경찰서가 수사에 나섰다.

쉽지 않은 수사였지만, CCTV가 있었기에 용의자 특정이 가능했다. 범행 당일 양씨가 지하철 역사 안에서 술에 취한 채 난간에 기대있는 A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택시에 태우는 모습 등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추적은 만만치 않았다. 그의 이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CCTV에 찍힌 동선에서 양씨는 현금만을 사용하고 카드를 쓰지 않았다. 신원이 노출될만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거주지 확인해 체포영장 준비

경찰 이미지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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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믿을 건 잠복과 CCTV 분석뿐이었다. ‘선불교통카드’와 CCTV를 통해 양씨가 주기적으로 정릉역을 오고 간 사실을 확인했다. 용산서 소속 형사 3명은 CCTV에 찍힌 양씨의 인상착의만으로 출퇴근 시간대에 정릉역에 잠복을 시작했다. 개찰구를 오가는 인원을 일일이 확인하며 비슷한 인상착의의 인물을 추적했다. 약 2달 만인 지난 5월 중순쯤 유력한 인물을 특정한 경찰은 그의 거주지 파악에 성공했다. 주소를 통해 주민센터에서 이름과 나이를 확인하고 신원을 특정해 법원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

집 덮쳤는데 엉뚱한 사람?…체포영장 집행 못 해

체포를 위해 급습한 거주지에는 양씨가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그를 체포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발부된 체포영장에 기재된 사람과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주민센터의 등록기준지에 등재됐던 인물은 제3의 인물이었다. 뜻밖의 주민등록법 위반 상황으로 눈앞에 범인을 두고도 체포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양씨는 체포가 아닌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양씨는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양씨가 임의동행에 응한 사실 등으로 도주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검찰은 영장을 반려했다.

용산서 관계자는 “잠복과 미행 등을 통해 범인을 특정해 거주지까지 알아냈지만, 예상치 못하게 등록기준지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오래전부터 거주하지 않고 있었다”며 “결국 발부받은 체포영장의 인적사항이 범인과 달라 체포를 하지 못했고 불구속 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지난 7월 준강간 혐의를 적용해 양씨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고, 검찰은 지난달 28일 양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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