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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옆 할머니가 한 말에…”···광주 두글자에 목 메는 미국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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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80년 5월 광주 현장의 미국인 증인, 폴 코트라이트 씨. 우상조 기자

1980년 5월 광주 현장의 미국인 증인, 폴 코트라이트 씨. 우상조 기자

“최루탄, 감옥, 형무소, 체포하다, 때리다….”

1980년 봄, 전라남도 나주시에 살던 미국인 폴 코트라이트(67)가 수첩에 써내려간 한국어다.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나주의 한센병 환자 시설인 호혜원에서 일을 돕던 코트라이트의 집은 광주에 가까운 남평읍에 있었다. 순천에 볼 일이 있어 광주 버스터미널에 간 그가 “데모가 크게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건 그해 5월19일. 그는 곧 광주와 나주를 오가며 군인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또래 학생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수일 간 광주의 외신 기자들을 도와 통역을 자처하며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다. 위의 수첩은 통역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정리한 흔적이다.

그는 당시 광주와 나주를 오가며 약 열흘 간 현장을 누비며 꼼꼼히 일기를 썼다. 2019년 광주를 다시 찾아 기억을 되살리며 기록을 검증했고, 『5.18 푸른 눈의 증인』(한림출판사)를 한국어로도 펴냈다. 국제교류재단(KF) ‘공공외교 주간’ 행사에 연사로 초청돼 한국을 다시 찾은 그를 지난달 26일 만났다.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그는 “10월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망한 날인데”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코트라이트 씨의 수첩. [한림출판사, 코트라이트 씨 제공]

코트라이트 씨의 수첩. [한림출판사, 코트라이트 씨 제공]

40여년이 지났고 그는 곧 한국을 떠나 안과의로 다양한 경력을 쌓으며 성공적인 삶을 꾸렸다. 그러나 여전히 80년의 광주를 얘기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 인터뷰 중에도 종종 목이 메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광주의 현장을 겪은 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었다”며 “당시 목격한 일을 떠올리는 것은 괴롭지만 그래도 증언을 하는 것이 내 소명이라고 생각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외국인이고 광주 출신도 아닌, 독립적인 사람”이라며 “그런 내가 본 현장의 진실을 꼭 전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전남 나주시 남평읍 소재 호혜원에서 일하던 시절의 코트라이트 씨. [한림출판사, 코트라이트 씨 제공]

전남 나주시 남평읍 소재 호혜원에서 일하던 시절의 코트라이트 씨. [한림출판사, 코트라이트 씨 제공]

그가 이런 다짐을 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탱크와 군인 곁을 지나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손을 꼭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외국인이니까) 우리를 위해 대신 목소리가 되어줘.” 이 말을 전하는 코트라이트의 눈시울은 붉었다.

코트라이트는 다양한 목소리를 기억했다. “길거리에서 ‘지금 우리가 시위를 할 때가 아니라 경제 발전을 해야지’라는 분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서로 협력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모습도 강렬히 기억한다. 무엇보다 그는 광주 금남로의 이야기뿐 아니라 광주 인근 곳곳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들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그는 “남평에서 목도한 일 중 특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라며 다음 이야기를 들려줬다.

“평범한 이들이 전부 나와 ‘전두환을 쫓아내자’며 경찰서로 향했다. 총기를 본 이들이 무장을 하려 하자 한 할아버지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총을 가져가면 안 된다. 이 총을 우리는 부숴버려야돼. 이 총이 우리를 더이상 죽이지 못하도록.’”  

[한림출판사]

[한림출판사]

코트라이트는 “광주뿐 아니라 인근의 모든 사람들에겐 5ㆍ18과 관련된 스토리들이 다들 있다”며 “택시를 타면 기사의 친척이 희생자라는 얘기를 듣기 마련이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모두에게 아픈 스토리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은 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오늘날을 사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팬데믹이 진정되면 바로 책을 들고 광주를 다시 찾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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