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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70세 청년화가 설원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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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저는 그림이 내러티브(이야기)를 해설하듯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화면에서 그런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죠. ‘이건 뭐 같아 보인다’라는 얘기가 최대한 나오지 않게 그립니다.”

조금은 알쏭달쏭한 말입니다만, 그의 그림을 직접 보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40년 이상 그림을 그려온 이 화가의 작품을 함께 볼까요. 오로지 점과 선, 면으로 채운 화면엔 동그라미, 진동하는 직선과 헝클어진 곡선 등이 눈에 띕니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그린 듯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화면 가득 팽팽하게 채워진 균형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니까요.

지난 3일부터 서울 삼청동 이화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설원기(70·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장) 작가 얘기입니다. 바로 두 달 전 미술품 컬렉터로서 서울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자신의 소장품 전시를 연 그가 이번엔 2년간 완성한 신작 중 30점을 골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그 전시 제목이 ‘그림’입니다.

설원기, 2020-41, 61x92㎝, mixed media on mylar copy, 2020. [사진 이화익갤러리]

설원기, 2020-41, 61x92㎝, mixed media on mylar copy, 2020. [사진 이화익갤러리]

장황한 수식어 따위 없이 타이틀에 오롯이 ‘그림’이라는 단어만 남긴 데서 본질을 추구하는 화가의 의지가 읽힙니다. 실제로 그는 “그림을 통해 기술 혹은 기법적인 능숙함을 보여주고픈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리듬, 속도, 흐름에 나를 맡겨 더 즉흥적이고, 단순하고 솔직한 느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면서요.

두 달 전 그의 컬렉션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을 때 이 작가에게 컬렉션이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습니다. 그가 틈틈이 젊은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여는 이유도 궁금했습니다. 2015년 그는 문성식·안지산 등 젊은 작가와 함께 3인전을 열고, 2017년엔 제자 21명과 그룹전을 열었는데요, 그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창작에 스승과 제자, 위아래가 어디 있나. 젊은 작가끼리 원로끼리 따로 모여 여는 전시가 싫었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잡히면 동료 작가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을 뿐”이라고요.

어쩌면 20년간 꾸준하게 이어진 그의 소박한 컬렉션은 새로운 변화의 흐름, 생동하는 에너지 자장(磁場) 속에 나를 열어놓는 행위는 아니었을는지요.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동시에 기본에 충실한 빈틈없는 내공이 느껴지는 그의 그림은 그렇게 쉽게 주어진 경지가 아닌 듯합니다.

지난 인터뷰에서 “작가가 보이는 그림이 좋다”며 “로비에 걸린 큰 그림보다 서재에 걸린 그림에 끌린다”고 한 그의 말이 떠오릅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기보다 온전하게 교감하고 자주 봐도 질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의 바람입니다. 나이 일흔에 청년의 기운으로 자신을 무장한 작가는 오늘도 “진화(進化)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작업이 자꾸 좋아진다는 말이 제일 반갑다”고 한 그의 말이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