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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은행이 알아서?…금융위 차도살인에 서민만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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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출만은 차질없이 공급하겠다는 금융당국의 약속에도 실수요자의 불안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이 전세대출을 가계대출 총량관리에서 제외했지만, 각 시중은행의 ‘자발적 규제’로 대출 문턱이 높아지면서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금융위원장·보험업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금융위원장·보험업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KB국민은행은 지난달 25일부터 신규 전세대출을 내줄 때 원금의 5% 이상을 반드시 분할 상환하도록 했다. 전세대출 2억원(금리 연 3.5%)을 받으면 이자만 낼 때보다 매달 갚아야 할 돈이 42만원가량 늘게 된다. “가계대출 관리를 위한 조치”라는 게 국민은행의 설명이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규 전세대출을 최대한 줄이려는 취지인것 같다”고 말했다.

고가 전세대출은 막힐 분위기다. 전셋값이 5억원이 넘는 전세대출에 유일하게 보증을 해주는 SGI서울보증보험이 고가 전세 보증 제한을 검토하고 있어서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지난 7일 “9억원이 넘는 전세도 상당히 많아져 일률적으로 제한할 생각이 없다”고 한 것에 비춰보면 앞으로는 전셋값이 15억원이 넘으면 전세대출을 받을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대출 금리도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은 지난달 말 기준으로 금리 상단이 모두 4%를 넘어섰다. 기준금리 인상 등에 따른 시장 금리 상승도 이유지만, 금융당국 발 규제 여파가 더 크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금융당국의 총량 규제에 맞추기 위해 각 은행이 우대 금리 축소 등으로 인위적으로 대출의 가격(금리)을 높이면서다.

이렇다 보니 지난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가계대출 관리를 명목으로 진행되는 은행의 가산금리 폭리를 막아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을 올린 이는 “금융위가 은행 수익을 높여주려고 가계대출 관리를 하는 건가”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대출 증가와 금리 상승에 따른 순이자마진(NIM) 확대로 내년도 은행의 이자이익은 48조원으로 올해보다 7.6%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치솟는 예금은행 가계대출 금리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은행]

치솟는 예금은행 가계대출 금리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은행]

전세대출을 둘러싼 불안감과 불만이 커지고 있는데도 금융당국의 입장은 한결같다. 당국 차원에서 검토한 바 없고 확정된 것도 아니며, 각 금융사가 자율적 혹은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위는 지난 7일과 8일 전세대출과 관련해 두 차례의 보도 반박 자료를 냈다. 전세대출 분할 상환과 관련해서는 “금융당국은 전세대출 분할상환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없으며 앞으로도 의무화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고가 전세대출 보증 제한의 경우 “구체적으로 검토된 바가 없고, 아직 확정된 것도 없다”고 밝혔다.

당국의 모르쇠 혹은 거리두기식 설명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은행권의 해석은 다르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위가 분할상환 확대를 지속해서 강조한 만큼 (국민은행이 도입한 전세대출 분할상환 방침이) 각 은행으로 점차 확대될 것은 자명하다”고 말했다.

차주단위 DSR 확대 계획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금융위원회]

차주단위 DSR 확대 계획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금융위원회]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분할상환이 부담스러운 세입자들이 다른 은행에 몰려 전세대출이 급증하게 되면, 다른 은행들도 (전세대출) 분할상환 의무화 같은 조치도 검토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SGI서울보증의 고가 전세 보증 제한 조치도 마찬가지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발표한 가계부채 관리 강화 대책에서 고가 전세대출 제한을 포함했다가 막판에 제외했다고 한다. 이미 실무진 차원에서는 충분한 검토가 끝났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당국은 고가 전세 보증 제한의 경우 서울보증의 자체적 검토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전세대출을 규제하고 싶었지만, 실수요자의 반발과 청와대의 반대로 못한 당국이 계속 찔러보기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훌쩍 오른 대출 금리에 대해서도 모른 척 뒷짐만 지고 있는 모양새다. 고 위원장은 지난 4일 (금리 상승에 따른) 예대마진 확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대마진 문제는 가격과 관련된 것이어서 제가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은행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대출 금리를 올렸다는 식이다.

대출 가능 금액 얼마나 줄어드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대출 가능 금액 얼마나 줄어드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당국과 고객 사이에서 동네북이 된 은행은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는 눈치다. 올해 가계대출이 큰 폭으로 늘어난 금융사는 하반기 금융당국에 호출돼 호된 질타를 받았다. 게다가 금융위는 내년도 가계대출 총량 관리 목표를 설정하며, 올해 실적도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은 "그동안 돈을 너무 쉽게 빌려왔다" “모두 실수요자라고 하는데 대출관리는 어떻게 하냐”라며 규제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맞다. 과도한 빚이 가계와 금융 시스템에 위험 요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은행과 보증기관을 동원한 금융당국의 차도살인(借刀殺人)식 대출 조이기에 실수요자인 서민은 피가 마르고, 은행과 금융사는 악덕 업자라는 비난까지 듣고 있다. 실제 판을 다 짰음에도 대출 규제와 관련해 '낫미(Not me·내가 아니다)'를 외치는 금융당국의 목소리는 폭등한 집값과 전셋값에 대출 없이 갈 곳을 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비겁함을 넘어 무책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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