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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한국이 꺼낸 종전선언, 美 “문재인 정부의 희망적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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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노규덕 한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왼쪽)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지난달 24일 서울에서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마쳤다. [사진공동취재단]

노규덕 한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왼쪽)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지난달 24일 서울에서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마쳤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달 12일(현지시간) 한국 정부 고위당국자는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 측과 협의를 마친 뒤 “우리가 생각하는 종전선언 구상을 상세히 설명했고, 우리 입장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깊어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외교전문가의 상황 진단 #“북이 먼저 비핵화 시작하면 검토 #한·미 동맹 차원서 반박하지 않아 #주한미군 철수론 불거질 우려도”

일주일 뒤 워싱턴에서 또 다른 한국 정부 고위당국자는 “(종전선언은)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계기로서 상당히 유용하다는 한·미 간 공감대가 있다”면서“미국은 성명 채택 시 어떤 영향이 있을지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고 내부적으로 심도 있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미 국무부 변호사들이 종전선언 문안에 대해 법률 검토를 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 정부 당국자들이 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전쟁 종전선언 제안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워싱턴의 동아태 전문가들이 전하는 미국 정부의 기류는 전혀 다르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종전선언에 대해 “우리는 각 단계의 정확한 순서나 시기, 조건에 대해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며 양국 간 이견을 시사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의 얘기는 이보다 더 직설적이다.

에반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 [서밋(뉴저지주)=박현영 특파원]

에반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 [서밋(뉴저지주)=박현영 특파원]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지난달 28일 인터뷰에서 “미국의 입장은 항상 (종전선언은) 북한 및 다른 나라와 대화 속에서 고려하고 논의해야 하며, 비핵화의 맥락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전선언은 북한이 어쩌면 비핵화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북한에 일방적으로 주는 선물이 아니다”라면서 “북한이 진지하게 비핵화 절차를 시작하면 검토할 수 있다는 게 미국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은 트럼프와 반대로 행동"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특히 “한국 정부는 스스로 열정에 포로로 잡혀 있다”면서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과 결이 다른데도 한국 관료 발언을 반박하지 않고 있다.
"바이든은 동맹 강화 및 협력을 외교 정책 전면에 내걸었다. 한·미 동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 트럼프 행정부와 모든 면에서 100% 반대로 행동하려고 한다. 가까운 동맹인 한국의 대통령 제안을 공개적으로 반박해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북·미 교착상태에 타개책이 있을까.
"한국 정부의 절박함(desperation)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은 서로 꼼짝할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나는 현재를 '안정적인 교착(stable stalemate)'이라고 부른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또는 핵 실험을 재개하거나,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한 이대로 지속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을 가능성은.
"ICBM 시험 발사나 핵 도발을 하면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이 깜짝 놀랄 정도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 정치적 이유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미국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모른다. 이럴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북·미가 위기로 치달은) 2017년 상황이 반복될 수도 있다."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가운데 미국이 북핵 문제에 있어 중국의 협조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라는 자극제(irritant)가 있는 게 중국에 유리하고, 미·중 갈등 속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도 해주고 싶지 않다는 정서가 중국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목표는 핵 보유가 아니라 체제 유지에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핵을 포기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고 설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정은에 외교적 승리 줄 수 없어"

워싱턴의 다른 한국통 전문가들에게서도 종전선언에 대해 비슷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최근 온라인 좌담회 ‘캐피털 케이블’에서 “누구도 평화에 반대하지 않지만, 북한이 계속 무기를 개발하는 현실이 평화와 거리가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종전을 일단 선언하면 왜 아직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느냐는 문제가 당장 불거질 수 있다”면서 “이를 계기로 북한 뿐 아니라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수미 테리 우드로윌슨센터 한반도 담당 국장은 “종전선언 논의가 진전되면 적대시 정책 철회와 주한미군 주둔 및 한·미동맹에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북한의 전략은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인데, 종전을 선언해버리면 핵을 가진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합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전문가를 인용해 “북한이 반복적으로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며 긴장을 끌어올리는 와중에 바이든 대통령은 대가를 확보하지 않은 채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