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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연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왕실 가족의 쉼터 향원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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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5)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향원정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경복궁 향원정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연에 감응하는 시정(詩情)은 한국의 정원을 이해하고 즐기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경복궁을 관람할 때 정문 광화문이나 금천교쯤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럴 경우 자경전 영역에만 다다르더라도 이미 한참을 걸어 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쉴만한 장소를 찾고 싶어진다. 자경전을 뒤로하고 계속 가다 보면 왼편의 집경당과 함화당을 지나 연지가 보이고 늠름한 백악이 한눈에 들어오면 우리는 이미 궁궐의 북쪽 끄트머리까지 당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향원이란 주렴계(周廉溪)의 애련설(愛漣設) 중 ‘향원익청(香遠益凊)’에서 따왔으니, ‘연꽃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이다. 경복궁 북쪽의 연지 앞까지 당도하지 않더라도 향원정(香遠亭)은 멀리부터 그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사각형 연지 안에 조성한 둥근 섬이 있고 그곳에 지은 아담한 2층 정자가 향원정이다. 네모 난 연지와 둥근 섬, 이곳에서 도교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를 정원에 도입한 동양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본 향원정의 육모 지붕에는 호리병 모양 절병통(節甁桶)이 씌워져 있어 모임지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물길을 지나 섬으로 들어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향원정 연지에 다다랐을 때 섬으로 건너는 다리가 얼핏 정자 뒤편에 감추어져 있다. 향원정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취향교이다. 취향(醉香), 연꽃 향기가 멀리까지 바람에 실려 가고 보는 이는 이미 그 향기에 취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을까. 잠시 취향교(醉香橋)의 다리 이름처럼 멀리 퍼지는 연꽃 향기에 취해 보자. 여름이면 연못에 가득 핀 연꽃이 참 곱고, 다리 아픈 관람객은 연못가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정자를 찬찬히 감상할 수 있다. 향원정은 고종 10년(1873) 왕실 가족의 휴식을 위해 지었다. 고종 10년 건청궁(乾淸宮)을 영건할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고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었다.

조선 세조 2년(1456) 경복궁 후원에 정자 ‘취로정(翠露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세우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이 기록의 취로정이 향원정의 전신인지에 관해서는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2018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표 논문에서 향원정이 있는 섬의 토층을 조사한 결과 향원정의 섬은 고종 대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이나 중건 이후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향원정 일대는 왕실 가족이 독서도 하고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원래 연못의 가장자리는 참나무 방죽으로 가렸고 정자가 있는 섬 둘레에도 가림장치가 있었다는 것을 옛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보수 공사를 마친 상황은 옛 모습대로 사람들이 정자의 아래층에 앉았을 때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가림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향원정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은 온돌이고 위층은 마루방이다. 아래층의 온돌방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난방하여 겨울에도 아늑하고 위층 마루방은 바깥 경치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시원한 구조다.

3년간의 보수 공사를 마치고 공개된 경복궁 향원정 일대. [사진 문화재청]

3년간의 보수 공사를 마치고 공개된 경복궁 향원정 일대. [사진 문화재청]

향원정 위층 내부의 천장 반자에는 온통 연꽃과 봉황으로 치장해 선경의 하늘을 연상케 한다. 위층 마루방의 기둥 사이 창호로는 인왕산과 백악, 그리고 녹음이 울창한 경복궁 경내 풍경으로 각각 그림을 담아내어 정자 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오랫동안 다리가 놓였던 남쪽은 물가에 이르는 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연지의 낮은 물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물속에 핀 연꽃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연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향원정에서 휴식을 취하던 왕실 가족의 여유를 관람객도 함께 마음에 그려보는 것도 좋겠다. 연지 둘레의 가장자리에서 향원정을 멀리 바라보는 아름다움도 경복궁 후원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전통 정원의 백미이겠지만 늘 주인 된 입장으로 향원정 즐겨보기를 권한다. 주인이라면 당연히 향원정에 들어가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현재 경복궁에서 펼치는 별빛 야행은 취향교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 향원정을 둘러보는 가슴 설레는 관람을 시행하고 있다.

이번 향원정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특이한 점은 일층 방바닥의 온돌 구조가 도넛형 온돌이라는 점이다. 온돌은 보통 밭고랑이나 부챗살 모양으로 고래(구들 밑으로 난 연기가 통하는 길)를 설치하는데, 향원정 온돌은 가장자리를 따라 고래를 뒀다. 따라서 정자 내부의 방바닥 가장자리를 따뜻하게 해 사람이 머름에 기대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특이한 온돌 구조로 생각된다. 향원정은 건립 이후 여러 차례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보강 공사가 진행됐지만 이번 해체·보수도 향원정 건물이 기울어졌다는 분석 결과 건물 전체를 들어내고 수리하는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막 해체보수공사를 마치고 드러난 향원정은 주변의 가을 경치와 함께 여전히 단아한 자태로 우리를 반기고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건청궁에 살면서 거닐 던 왕실 정원이니 당연히 섬으로 건너는 취향교(醉香橋)는 건청궁 쪽에서 진입하도록 놓였다.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자료인 ‘경복궁 배치도’와 ‘북궐도형’, 유리건판 사진 등을 보면 취향교 방향은 북쪽 석축 위에 다리 상판을 설치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의 취향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는데 향원정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새로 설치할 당시에는 건청궁도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려 나가 흔적도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복궁 남쪽에서 진입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기 편한 방향으로 다리를 설치하고 오랫동안 그렇게 두었다.

그리고 2021년 복구된 취향교는 나무로 만들고 건청궁 쪽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가는 북쪽의 다리 입구에는 구리 지붕을 올린 자그마한 문을 설치했다. 문화재청은 발굴조사를 통해 다리 위치를 확인하고 옛 사진을 참고해 취향교를 건립한 뒤 흰색으로 칠했다. 그동안 남쪽에 놓였던 취향교 단청의 주칠과 뇌록에 익숙했던 관람객은 이번에 복구된 취향교의 형태가 친숙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리 상판의 아치는 곡선 구조가 강해져 궁궐 대문이나 돌다리의 홍예처럼 둥근 곡선에 가깝고 난간 구조가 철골 구조를 연상시키는 가는 선이나 다리의 채색도 전통 단청이 아닌 흰색 칠이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조선 말 서양식 건축 양식이 궁궐의 구조물에 도입된 절충 방식으로 창경궁 대 온실이나 덕수궁 정관헌의 난간에서도 볼 수 있다. 서양의 석조 건축에 철골 구조가 우리의 건축에 유입되면서 철골로 만들 수 없는 것은 나무로 그 형태를 깎아 철골 부재와 혼용해서 사용한 경우이다.

열상진원(洌上眞原)

밖에서 향원정 연지를 오른쪽으로 돌아 북쪽에 다다르면 제법 격식을 갖춘 석물로 치장한 작은 샘이 나온다. 열상진원(洌上眞源), 향원지로 흘러드는 샘물의 우물 뚜껑 옆면에 새겨진 글이다. 여기서 열상은 한강의 옛 이름인 열수(洌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됐다. 이물이 열수, 즉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말이다. 백악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샘으로 모여 향원지로 흘러 들어간다. 이 물이 영제천으로 흐르고,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므로 이곳을 상징적으로 진원(眞源)이라 표현한 것이다.

백악(白岳)의 물줄기에서 시작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으로부터 연지로 흘러들어오는 수조(水槽)의 꾸밈은 자못 예사롭지가 않다. 수조의 구조는 일부러 거친 물살을 한차례 꺾어 물의 흐름을 늦추기 위해 둥근 모양의 그릇에 물을 모이게 한 다음 물길 바닥을 ‘ㄱ’자로 꺾어 조각했다. 연못을 지극히 정적인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샘 앞의 물이 고이는 수조에는 태극을 새겼다. 물결은 태극을 따라 둥근 물 그림을 만들면서 연지로 흘러든다. 그리고 한 번 더 물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밑 돌 판에 물결을 잠재우는 얕은 고랑을 파서 조각을 했다. 옛사람들은 들리지 않는 풍경까지도 마음으로 읽어 그 고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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