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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 투자금 회수겠지"…'낳음 당했다'는 그들의 분노 [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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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안은 부모 모습. 사진 pixnio

아이를 안은 부모 모습. 사진 pixnio

"어릴 때부터 효도 강요하는 부모님이 싫었어요. 꼭 투자금 회수하려는 느낌이었거든요."

"집에 여유가 없는데 왜 낳았냐고 부모님을 원망했어요. 불효자인 것 같아 괴로울 때도 있죠."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한탄 글의 일부입니다.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번다는 밀레니얼 세대에 특히 퍼진 생각인데요.

[밀실]<제77화> #효도 패러다임 변화, '반출생주의' 외치는 이들

“집에 여유가 없으면 제발 아이를 낳지 말라”는 자녀 입장의 조언부터 “우리 때는 부모 마음 아플까 봐 하지 못했던 말을 자녀한테 들었는데 너무 서럽다”는 부모 입장까지…. 각자 불행을 토로하다가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는 자조 섞인 말로 끝을 맺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불행을 토로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맞는 말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철학가도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을 권리에 대해 말하는 ‘반(反)출생주의’를 체계적으로 논증한 사람인데요.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 철학과의 데이비드 베너타(David Benatar) 교수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 존재하게 됨으로써 해를 입었다며 그 고통을 미래 아이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부모라고 해도 자식을 세상에 나오게 할 권한이 없으며, 세상에 나오게 한 고통을 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죠. 삶의 고통을 토로하는 밀레니얼들이 모르는 사이에 반출생주의 철학을 논하고 있던 겁니다. 밀실팀은 베너타 교수에게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의 고민을 설명하고, 생각을 들어봤습니다.

※반(反)출생주의의 아버지 데이비드 베너타 교수의 자세한 설명, 인터뷰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낳음 당했다’는 사람들

“흙수저로 태어나 ‘개룡’은 꿈도 못 꾸는 세상이잖아요. 학자금 대출로도 허덕이는데, 부모님은 아르바이트 비용 일부를 생활비로 달라고 하세요. 원하는 걸 마음껏 해본 적도 없어요. 부모님은 왜 나와 언니를 생각 없이 낳았을까.”

대학교 2학년이 된 양모(21)씨의 한탄입니다. 행복한 대학생활을 즐겨야 하는 나이에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로 허덕이고 있다는데요. 이런 양씨를 더 힘들게 하는 건 효도가 당연하다는 부모님의 생각입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힘들다고 토로하면 ‘고마운 줄 알아라’,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반복한다”며 “공부 열심히 해서 효도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라고 토로합니다. 몸 뉠 좋은 방 한쪽 구하기도 힘든 세상에 부모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혼인과 임신은 많은 이가 지나는 과정이다. [중앙포토]

혼인과 임신은 많은 이가 지나는 과정이다. [중앙포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양 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연말 결혼을 앞둔 심모(33)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정서적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걸 어른이 돼서 깨달았다”고 해요. 심씨는 “힘든 형편도 아니었는데, ‘너희 형제 아니었으면 더 좋은 차 탔을 것’과 같은 말을 늘 들으면서 자랐다”며 “부모님이 ‘투자’라는 말을 썼을 때, 충격을 받았고 그게 정서적 학대였단 걸 나중에 알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부모의 사랑일까요. 이들은 절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양씨는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해주려는 노력만 있어도 지금만큼 원망은 안 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심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효도라는 게 지금은 너무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진다”며 “좋은 부모였다면 알아서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이라고 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아이를 낳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장 염려하는 존재인 자녀들에게 고통을 야기한다."

심씨나 양씨 같은 이들을 보는 베너타 교수의 주장입니다. ‘낳음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베너타 교수의 철학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또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죠.

심씨는 아이를 낳을 지에 대한 결정을 미뤘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며 “적어도 부모 부양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설명합니다. 양씨는 결혼과 출산을 생각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이렇게 힘든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죠.

실제로 한국 사회는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습니다. 수저론이 등장한 뒤, 자본으로 계급을 나누는 현상이 어린이 또래 집단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이모(31)씨는 “요즘 교실에선 ‘집이 몇 평이냐’는 질문이 유행하고 있다”며 “아이들이 나에게까지 ‘어디 사냐,’ ‘몇 평에 사냐’는 질문을 한다”고 말합니다. 박탈감에 따른 우울감이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지배하는 이유죠.

반출생주의 철학가 데이비드 베너타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나온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나타낸 표. 이정민 인턴

반출생주의 철학가 데이비드 베너타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나온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나타낸 표. 이정민 인턴

베너타 교수는 아이를 낳지 않고 싶다는 사람들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는 밀실팀에 “태어난 이후 좋은 일을 겪는 게 나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라며 “다만 존재하지 않았다면 겪을 필요가 없는 고통이 크다는 얘기”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게 해줬다는 사실만으로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끼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가 고통을 야기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더 좋은 관계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그처럼 반출생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겐 문제가 아닙니다. “태어나지 않은 그 존재를 배려한다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며 “한국 같은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고자 하는 건 고령화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느껴야 하는 개인을 위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다는 겁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는 생각, 단순히 비관주의자들의 입장일까요? 아니면 한 번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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